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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양사, 오현사, 예양서원’(2)예강칼럼(124)/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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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7  10: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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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鄕校)가 관립학교라면, 서원(書院)은 사립학교이다, ‘신잠祠/예양祠’ 건사(建祠)에 비추어 ‘예양書院’ 건원(建院)은 쉽지 않았던 모양. ‘선현 사당’을 모시면서, ‘교육 강학’을 해야 되니, 선생과 학생 등 인적자원에 강당, 장서고와 기숙사 등 물적설비가 필요하다. 왕의 사액(賜額)은 다음 일이고, 우선 중앙과 지방관서의 인증을 받아야한다, 아마 ‘예양祠’는 ‘월봉 김광원’ 또는 ‘오현祠’ 추배 등을 계기로 ‘예양書院’ 역할을 도모했지만, 그 사정이 여의치 못했을 것. <정묘지,1747>는 <총서,학교> 편에서 “향교/ 사마재- 금속(今屬) 오현祠”를 말하면서, <부내방,사묘> 편에 “오현祠(享, 5현)/ 충렬祠(享, ‘한온, 정명세’)”을 말하고, <부동방,사묘> 편에 ‘연곡書院(1726년 사액)’을 기록했다. 요컨대 <정묘지>는 ‘오현祠’라 했을 뿐, ‘예양書院’으로 칭하지 않았다. 물론 1681년 전후에 ‘예양사/오현祠’ 명칭으로 ‘예양書院’을 자임할 수는 있었을 것이고. “예양강지상 예양오현서원”이라는 용례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예양서원’의 조직적 실체와 활동을 뒷받침할 기록과 시문이 거의 없다.

이하, ‘오현祠 5賢’을 살펴보건대, ‘오현(五賢) 추배’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최초에 ‘영천 신잠’, 또는 ‘신잠主享 + 천방配享’ 체제였지만, 최종적으로 합벽된 ‘오현祠 5賢’ 위계순서에 따라 소개한다, ‘5賢’ 선택은 장흥인의 주체적 판단이요, 자각일 수 있다, 모셔진 五賢은 “당대 현실권력에서는 소외되었지만 역사적 절의(節義)를 지킨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중에 ‘연곡서원’으로 모셔진 ‘노봉 민정중(1628~1692)’에 대해 애초 ‘예양사, 오현사’ 쪽에의 합벽 시도를 거부했음은 이미 모셔진 5賢의 節義기준에 이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5賢의 외지인들, ‘목은, 추강, 영천’ 3賢은 장흥지방과 연고성에 있어서 그 설득력이 컸었다.

1) 목은 이색(1328~1396), 한산 이씨, 유배기간은 1392,7월~12월이다.
비록 6개월 짧은 기간이었어도, 여말선초 교체기에 있어 신흥세력에 빌붙는 선비들의 정파적 행태에 선을 긋는, “자존적 節義”를 보여 주었다. 당대 일류학자로서, 14세기말 장흥풍경으로, 왜구를 피해 외지 피난을 마치고 돌아온 장흥府 사람들이 힘을 모아 ‘황보城’을 축성하는 모습을 <중녕산 황보성記>로 남겼다. ‘장흥府/벽사驛’에 짧은 詩文도 남겼다. ‘이색’의 장흥 유배 전 일이지만, 부친 ‘가정 이곡(1298~1351)’이 장흥출신 曺氏여자에 관한 <절부 曺氏傳>을 썼음도 유념해두자.

2) 추강 남효온(1454~1492), 의령 남씨, 유배가 아닌, 여행을 왔었다.
당대 조정에 “생육신(生六臣) 節義”로 저항하던, 그는 장흥 땅을 찾아와 15세기말 장흥풍경을 그렸다. <조대기(釣臺記)/ 장흥우음(偶吟) 21수>와 몇 詩文에서 그 무렵 장흥산천과 사람들을 기록했다. 오늘의 ‘사자산’을 ‘착두(錯頭)산’이라 불렀으며 ‘사인암, 수인산, 예양강, 수녕천’을 거명했다. 훗날 장흥선비들은 “추강”이 남긴 ‘추강 조대운(釣臺韻)’을 잊지 않았다. 사후 부관참시를 당하고 말았지만, 특히 ‘만수재 이민기’가 “추강 節義”를 흠모했다. 혹자는 아직도 오해하는데, 그는 유배객이 아니다. 당시 장흥 유배객이던 ‘함안윤씨 윤구(연산군의 외삼촌)’, 당시 장흥출신 관료였던 ‘廣州이씨 이침’을 만나러 장흥(冠山)에 왔던 것이고, 장흥의 ‘영광김씨 김몰’과도 가까웠다고도 한다. 아직 장흥 장평의 ‘남씨 집성촌’이 없던 때라 그 일가촌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3) 영천 신잠(1491~1554), 고령 신씨, 유배기간 17년(1521~1537)
장흥 유배記 <관산록(冠山錄)>에는 16세기 전반의 장흥풍광이 오롯이 들어있다. ‘신숙주’의 증손자로서 보수기득권 왕당파 세력에 속했을 법도 했건만 이른바 ‘조광조’ 일당의 주류로 취급되던 “기묘명현 節義”에 속한다. ‘신사무옥(1521)’으로 곤장을 맞고 내려와 장흥 땅에서 무려 17년을 지내는 동안 적극적으로 융화했던 달관적 학덕(學德)은 훗날 ‘신잠祠’로 기려졌고, 이는 강진유배객 정약용(1762~1836)과 차이를 보여준다. 명문가 출신의 수준 높은 인문학적 삼절(三絶) 역량으로 장흥제자들을 키워냈다. 소외된 남도선비와 유배객 명현들과 교류한 ‘보림사 서계시회(西溪詩會)’는 따로 재평가될 수 있을 것.

4) 월봉 김광원(1478~1550), 영광 김씨, 장흥 부산방 출신
자 언명(彦明), 이조참판 ‘김필(1426~1470)’의 손자, ‘정암 조광조(1482~1519)’의 제자, 사마양시 입격자이다. 그 당시 장흥名家 영광김씨 출신으로 ‘우산 안방준(1573~1654)’이 <기묘명현록>에서 그 “기묘 節義”를 평가했다. 단 장흥에서의 활동기록과 시문이 남지 아니하여 일부 의문점을 낳기도 한다. ‘월봉 추배논란’이 생긴 까닭은 ‘예양祠’에 추배 발론을 하면서 ‘수향(首享) 병향’ 지위를 요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 당대 인물 ‘영천 신잠, 천방 유호인’과의 교분관계가 모호했던 사정도 작용되었을지 모른다. (당시 추배논란이 정리되어 있다는 <월봉실기(實記),1932>를 직접 검토하지는 못했다.)

5) 천방 유호인(1502~1584), 강릉 유씨, 장흥 부동방(건산) 출신, 용계방 거주
장흥제자들을 육성하였던, 장흥지방의 사표(師表)로서 그는 자생적 장흥학맥의 기원이 되었다. 문인에 ‘청계 위덕의(1540~1613), 반곡 정경달(1542~1602)등이 있고, 그 ‘위덕의’는 다시 ‘선씨(宣氏) 형제들, 위정훈 위씨형제’ 등을 가르쳤다. 詩 <영소(詠梳)>에서 탐관오리 척결이라는 민중적 시각을 드러냈고, 기우제(祈雨祭)에서 그 몸을 나뭇더미에 던지며 하늘의 뜻을 물었던 “천방(天放) 節義”를 보여주었다. 먼저 ‘남명 조식(1501~1572)’에게 배웠으며, 나중에 ‘율곡 이이(1536~1584)’의 문인이 되었다. (‘천방 학맥’은 다음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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