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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방촌마을 이야기<4>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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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7  10: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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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7. 산저 동계(山底 洞契)
산저마을은 천관산 동쪽의 성조골과 대나무골이 멈추는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성조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을 앞쪽으로 흐르고 개천 위쪽에 마을을 형성하여 남향(南向)하고 있는 곳은 양달 산저이다.

   
 

개천 건너 대나무골 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을 응달 안산저라고 한다. 천관산 바로 밑의 마을로 지형이 마치 돼지가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形局)이라고 해서 불린 이름으로 뫼밑등(嶝) 이라고도 불리었다. 최초에는 '뫼산(山)' '돼지 저(猪)'를 합하여 산저(山猪)라 표기하였으나, 지금은 산 밑이라는 의미로 “산저(山底)”로 표기하여 쓰고 있다. 구전에는 이씨, 김씨, 배씨 등이 터를 이룬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응달 위정희 가옥 옆 뜰이 “배가들 터”란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산저에는 1860년경 서암(西庵) 위덕기(1835~1905)가 탑동에서 분가하여 현재 위백의 집터에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집안에는 1952년(壬辰) 4대 봉사(奉祀)의 공간인 사당(祠堂)을 안채 뒤에 신축하였다. 응달 산저마을 뒤 계곡 지명을 도곡(道谷)이라 한다.

   
 

방촌8경 중, 제7경 “도곡귀운(道谷歸雲)”은 마을 뒤 도곡에서 넘어오는 석양녘의 구름은 사뭇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문중 서적을 도맡아 번역한 도곡(道谷) 위계방(1929~2014)이 이곳 응달 산저 태생이다.
방촌마을 회관에서 앞 국도를 이용 남쪽으로 200여 미터 가다보면 산 아래 우측에 호산(범산)마을이 위치한다. 천관산 성조골 아래 구릉성 야산 비탈면에 조성된 마을로, 풍수설에 의하면 전체적인 마을 형상(形像)이 호랑이 같이 생겼다고 하여 “虎山”이라 하였다. 위백환이 거주했던 집 아래 도로가에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과 위길환 집터 아래 우물 등 2곳이 현재도 남아 있다. 2곳의 우물이 호랑이의 좌우 눈(目)이고, 가운데에 위치한 위헌량 거주 집터는 입(口)에 해당된다고 전한다. 호산 마을은 존재선생의 차자 양천(陽川) 위도급(1754~1821)이 1770년 중반에 계춘동에서 분가하여 현재의 위전환의 가옥 터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조성되었을 거라 추정된다.

   
 

마을의 안길은 전면의 큰 도로에서 급한 경사를 계단으로 처리하였으나, 북쪽에서 옆으로 비스듬하게 설치하여 편리성을 도모하였다. 분가 과정에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영역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날 다산재(茶山齋)와 송촌리 평촌마을 유천재(柳川齋)에서 한학을 강학하였던 다초(茶樵) 위복량(1897~1975) 선생의 생가와 경향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고영재(1948년생, 관산읍 용전리 거주)가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까지 생활한 외가(外家) 위현량 집은 빈집으로 남아 적막감과 서글픈 마음이 앞선다. 마을 앞 개천에 흐르는 물은 천관산 자락 계양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계양재(桂陽齋) 옆 방촌저수지에 담수(湛水)된 다음 탑동 마을을 거쳐 흘러 내려온다. 산저마을 가운데 개천에 흐르는 물은 천관산 자락 성조골에서 발원하여 양달 산저 앞을 거쳐 흘러 내려온다.

   
 

성조골에 비가 내리게 되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의 길이는 20m 정도에 이르고, 겨울철에는 폭포수가 얼어 얼음골이라 부른다. 이곳을 방촌8경 중, 제6경의 “성동폭포(聖洞瀑布)”라고 한다. 이 두 물줄기는 허수아비골 앞 계천에서 합류(合流)하여 송촌리 평촌마을 유천재(柳川齋) 앞과 대평마을 들판을 거쳐 득량만(得糧漫) 바다로 유입된다.

   
 

또한 성조골 입구에 위치한 지석묘(괜돌)는 동양 최대의 크기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산저와 범산은 행정상 방촌리 5반에 해당되고 거주민은 21호이다. 2000년 이전에는 부상계(賻喪契)를 공동으로 운영하여 장례(葬禮)를 주관하였다. 동계와 관련된 "山底 洞契案" 문서를 현재까지 보존 사용하고 있다. 다만 장례(葬禮)시 사용했었던 물품 일체를 1990년경에 도난 피해를 당하였다. 보유 재원은 논 4두락과 일정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8. 탑동 동계(塔洞 洞契)
탑동(塔洞)마을은 천관산 동쪽자락 아래 평탄한 지형에 입지(入地)하였다. 23번 국도 장흥대로변 마을 입구 동산 아래에 위병량(1879~1900)의 配 효열부 인천이씨의 행적비가 위치한다.
마을 초입 논에 세워진 석탑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으로 사정고탑(射亭古塔)이라고 한다. 1992년 탑(塔)을 도난당하여 기단(基壇)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 주민들은 탑을 복원하여 탑동(塔洞)의 면모를 찾았다.

   
 

천관산 주변에는 89개 암자가 있었는데 이중 탑동에 있던 암자의 새벽 풍경소리가 듣기 좋음의 표현을 “탑동효종(塔洞曉鐘)” 이라고 하며 방촌8경 중, 제5경에 해당된다. 마을 전면에는 넒은 "사정이 들판"이 형성되고 건너편 등전, 내동, 계춘동, 새터 등 동쪽마을이 보인다. 마을 내 위씨의 최초 입향은 존재선생의 둘째 동생 동산(東山) 위백신(1736~ ?)이 1760년경 계춘동에서 분가하여 현재의 위성계 가옥 자리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옥은 입향 당시에 지어진 집이라고 전해진다. 안채는 근래 들어 크게 보수하여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보수 前의 옛집은 방의 문턱이 상당히 높았다고 하는데 이는 호랑이가 무서워 방어 수단으로 집의 구조를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필자는 지난 시절 고향 방촌에서 “에라 호랭이나 물어가라, 지랭이 호랭이는 뭐한지 모르건 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지랭이는 탑동 뒤 천관산 자락 계양봉 아래 골짜기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다. 마을은 장흥위씨가 입향하기 前부터 다른 성씨에 의해 성촌되었던 곳이다. 원래 계양봉 밑 계양동에 있었으나 호랑이가 무서워 지금의 마을 자리로 내려 옮겨왔다고 전한다. 옛날에 실제로 마을까지 호랑이 출몰(出沒)이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주민들 중에는 장흥위씨 외에 인천이씨, 파주염씨가 있다. 인천이씨는 현 거주자 이안주(1954년생)의 증조모가 장흥위씨로 1880년경 증조부 때 용산면 접정에서 처가인 방촌에 입촌하였다고 한다. 파주염씨는 1780년경 염종건(廉宗揵 1763~?)이 보성군 문덕에서 안항 위덕후의 5대 종손 위백원(1709~1793)에게 시집온 고모할머님을 뒤따라 입촌한 후 7대손까지 200여년 거주하였다. 이중 증손 남곡(南谷) 염석진(1879~1956)은 탑동에서 장흥읍 덕제리로 분가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장흥지역 내 여러 사우에 현판 글이 남겨져 있다. 5대손 염병일(1905~ ?)은 당대 대목장으로 알려졌으며, 1950년 다산재(茶山齋) 중수에 참여했다. 마을 안길은 호동에서부터 내려온 작은 길이 마을 안쪽으로 연결되고 이 길은 호산(범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 뒤에는 계양봉에서 흘러 내려온 물을 담수한 방촌저수지가 있다. 1961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축조하였으나 적은 규모로 토사가 쌓여 있고 유입된 수량(水兩)도 적어 재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마을 뒤 계양산 자락, 관산읍 방촌1길 44-65에 계양재(桂陽齋)가 위치한다.

   
▲계양재

이곳은 반계 위정명(1589~1640)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78년(戊午) 안항공파 반계종중에서 건립하였다. 매년 4월 첫째 일요일 반계선생 이하 후손 35位의 제향을 봉행한다. 관산읍 방촌1길 61-29 탑동마을 앞 들판 가운데 양사정(楊社亭)이 위치한다.

   
 

이 정자는 2010년(戊子) 장흥군청(군수 이명흠)의 마을 정자 짓기 추진 사업 지원금 25,000,000원과 탑동 동계금 35,000,000원 등 일금 60,000,000원 예산으로 그해 6월 23일 준공하였다. 사정이 들판에 위치하여 시원한 남풍이 불어와 마을의 주요 회의, 삼복더위 때 복달임 모임 장소로 활용 등 6월~9월간 여름철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호동(壺洞 쇵골)마을은 천관산 계양봉(325m) 지맥(地脈)이 북동쪽으로 이어지면서 나지막한 야산 망치봉(83m) 아래에 위치한 남향(南向) 마을로, 풍수설에 의하면 개가 새끼를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라한다. 위쪽 천관산 자락 계양 마을이 동네를 감싸 안고 있고 좁은 목에서 점점 앞들 쪽으로 넓어져 술병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위팔만 거주 가옥부터 천관산 입구 주차장 앞까지 넓은 공간 뜸 지명을 “번덕지”라고 한다. 방촌 내 12곳 뜸에서 가장 나중에 조성된 마을이다.  호동은 1770년경 원취당(願醉堂) 위도순(1748~1816)선생이 오헌고택(梧軒古宅)에 터를 잡아 이후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본다. 관산읍 방촌1길 44에 위치한 오헌고택은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 선생에 의해 완성되었다. 1918년(戊午)에 안채와 사당이 건축되었고, 사랑채는 1923년(癸亥)에 지어졌다.

   
▲오헌고택

문간채, 연못 등 8채 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축조 당시 공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다양한 민속생활사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지역문화와 향촌 생활사 등의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1986년 2월 7일 전라남도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4월 13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7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특히 12代가 연속해서 문집을 남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조흥은행장을 지낸 위성복(1939년생)이 이곳 태생이다. 관산읍 방촌1길 42에 위치한 위수환 가옥은 존재 선생의 셋째 동생 서계(書溪) 위백순(1737 ~1815) 선생의 三子 위도업(1771~1842)이 1800년경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4대 봉사(奉祀)의 장소인 사당(祠堂)은 1849년(己酉) 윤 4월 6일 상량 신축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천관산 자락 장천동(長川洞) 계곡 입구 뇌문탄(雷聞灘) 앞 물줄기를 놓고 방촌리 호동마을 오헌(梧軒) 위계룡 선생과 인근 당동마을 백수인 선생 등이 중심 되어 재판 소송을 하였다. 이 재판을 거쳐 방촌리가 승소(勝訴)한 후 한쪽에 수로(水路)를 설치하여 물길을 방촌마을 쪽으로 흐르게 하였다.

   
 

이 물줄기는 천관산길 한쪽 수로를 통과하여 호동마을과 탑동마을 앞 사정(射亭)이 들판을 적셔주고 호산 앞으로 흐른다. 마을길은 천관산 입구 주차장 앞에서 시작한 길은 마을안쪽으로 통하여 있고, 좌측 길은 방촌마을 앞 국도와 우측 길은 탑동과 연결되어 있다. 방촌8경 중, 제4경에 해당된 “호동초적(壺洞樵笛)”은 장천동, 호동 일대에서 나무를 해오며 부르는 초동들의 아름다운 피리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방촌에서는 피리를 흔히 “촐래”라고 하는데 두개의 피리를 한입으로 부는 쌍촐래 소리는 더한층 아름답다. 탑동과 호동마을은 행정상 방촌리 6반에 해당되며, 현재 21호가 거주한다. 탑동의 경계는 좌측 안쪽 위봉현님의 가옥을, 우측은 위주량님의 가옥이, 뒤쪽은 계양재가 경계가 된다. 호동의 좌측 경계는 최근에 들어선 천관카페, 우측은 안쇵골 초입 지왓등(嶝), 뒤쪽은 망치봉이 경계된다. 지난날 부상계(賻喪契)를 운영하여 장례(葬禮)를 주관하였다. 동계와 관련된 "塔洞 洞契案" 문서와 장례시 사용했던 상여틀 등 물품일체를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현 보유 재원은 논 18두락과 일정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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