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생(先生)”칭호 - ‘천방先生’ 호칭으로 보아 “존재선생이 ‘천방선생’을 무척 존경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는데, ‘先生’ 호칭은 극존칭도 되지만, 학덕 있는 선학이나 선비, 과거 급제자에게도 붙는 일반적 존칭도 된다. ‘영천 신잠’의 <관산록>에 나온 ‘연곡先生, 연곡子’를 두고 “연곡先生을 ‘신잠’이 지극히 존숭했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관산록>에는 ‘귤정 윤구’를 ‘윤子’, ‘인보 정만종’을 ‘정子’로 불렀을 정도다. ‘만수재 이민기’는 ‘기봉 백先生’이라 했고, 후대에 ‘소석선생, 오헌선생’ 호칭도 나오니, ‘천방先生’ 호칭에 민감하지는 말자. <정묘지>는 ‘천방선생’을 ‘鄕(향)선생/ 향당사종(鄕黨師宗)’이라 지칭했다.

2) 학맥과 제자들 - 후손 후학들은 ‘율곡(1536~1584) 문인’을 강조하지만, 선생은 먼저 ‘남명 조식(1501~1572)’을 배웠고, 남명 타계 이후 1577,1578년경에 해주시절의 ‘율곡’을 일시 찾아갔다. 학문적 노선변경이 아닌, 당신의 학문적 지평의 확장일 것. ‘옥봉 백광훈(1537~1583)’과 진사시 동방인 ‘율곡’은 ‘천방’과 같은 1584년에 먼저 타계하였다. <정묘지>는 ‘남명 조선생’을 기재했을 뿐, ‘율곡문인’ 사정은 미기록했다. 당대시점은 기축옥사(1589) 발생 이전으로 천방선생은 당색(黨色)초월한 산당(山堂)처사였을 뿐이고, 제자들을 ‘율곡 노선’으로 몰아 키우지는 아니했을 것. 제자 ‘반곡 정경달(1542
~1602)’과 그 아들 정명열은 ‘동인’ 쪽이었다. ‘정경달’을 ‘수제자’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그는 소과낙방 후 서울 외지로 나가 과시에 진력하여 1570년 대과급제자로 출사한 입장이니, 연배가 앞선 ‘청계 위덕의(1540~1612)’가 수제자였을지 모르겠다. (정경달은 스스로 ‘삼석(三席)’이란 표현도 했다) 1573년 생원입격 위덕의는 은퇴 후에 제자교육에 나섰으며, 훗날 ‘죽천사’ 주벽으로 모셔졌다. 한편 ‘정경달이 극진히 모셨던, 인근의 평생처사 ‘송정 김경추(1520~1612)’는 ‘송천 양응정(1519~1581)’의 제자인데, 그 유문(遺文)에 ‘천방선생’은 등장하지 않았다.

3) 천방선생은 “장흥 고문학 시조”인가? - 장흥 일각에서 사용하는 ‘고문학 시조’ 표현은 합당한가? 그 고문학(古文學) 개념의 시간적 내용적 범주는 어떠한가? 아마 장흥 학맥의 자생적(自生的) 태동을 강조하는 발상일 것으로 짐작되나, 그 출생은 늦으나 몰년은 앞서며 문집을 남긴, ‘기봉 백광홍(1522~1556)’도 있다. 1699년경 <신증여지승람 수정판> 준비 중에 ‘장흥지방 대표선비’를 선정함에 있어 후보 3인(백광홍, 정경달, 김삼달)의 인물지열(人物之列) 논란이 있었는데,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백광홍, 김삼달, 정경달’ 순서를 언급하였다. 무장현감 관력의 영암김씨 김삼달은 ‘천방선생’과 ‘1534년 소과동년’이고, 1543년 대과에 1546년 문과중시 급제자이다.

4) “영천 신잠”과 관계는 어떠했을까? - ‘천방선생(1502~1584)’은 ‘영천 신잠(1491~1554)’을 모신 ‘신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서로 전혀 인연이 없다면 그런 일은 부자연스러울 것. ‘신잠’의 <관산록>에 ‘유호인’은 없지만, 그 시절 연배로 ‘신잠’의 제자였던 ‘남계 김윤(1506~1571)’은 반곡 정경달의 고모부로, 그 아들 대과급제자 ‘지천 김공희’는 반곡의 고종사촌 형이다. 원래 ‘천방’은 ‘부동방 건산’ 출신이고, <정묘지>에 현 장흥읍에 속한 ‘부동방’ 인물로 등장한다. ‘건산처사’ 별호도 있었으니, ‘국당 임희중(1492~)’의 방문詩에 “暮宿(모숙) 건산처사劉(유)”로 나왔다. 장흥부 치소에 가까운 ‘건산’에서 1570년경에 ‘용계방 연하동’으로 이거했으니, ‘영천 신잠’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있겠다, ‘천방’은 1534년 소과 입격자이고, ‘영천 신잠’은 1537년 해배로 장흥을 떠났다.

5) <천방유집>의 “시(詩) 백수’를 누가 수습하였는가? - 어떤 劉씨후손이 1816년경에 남긴 언급, “그 문인 위백규가 주워 모았으며, 단지 詩백여수를 수집했다.”는 것에 터 잡아 “존재가 그 유고수습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정경달’은 <천방행록(1599)/천방행장(1600)>에서 “선생유고를 보관하다가 그나마 詩 백수를 지켰다”고 말했고, ‘위백규’도 劉씨후손들이 가져왔을 유고에 있는 ‘소시(梳詩)’에 관한 <소시변(辨)>에서 ”정경달이 삼석(三席)에서 스승의 詩 백수를 수습했다“고 전언했다. 한편 “경학(經學)분야 유고(遺稿)를 누가 수습했는지”도 문제되는데, 당시 劉씨후손들이 검토를 부탁했을 ‘유고’에 대한 추기(追記)로 <書(서)천방유선생일고(逸稿)후 /일고후서(逸稿後?)>를 1777년에 남겼을 뿐이니, 그 <일고(逸稿)후서>의 기재 범위를 벗어난 유고 행방은 존재도 모를 일. 1798년에 존재선생이 타계했던 반면에, <천방선생유집>의 ‘목판본 소판’은 1811년경에, ‘목판본 대판’은 1819년경 간행으로 짐작된다. ‘천방선생 묘갈명(1924)’은 한참 이후에 등장했다.

6) 존재선생이 그 목판도 2점을 그렸는가? - 그럼에도 “천방선생을 존재선생이 흠모한 나머지 <천방유고>를 적극 수습했고, ‘목판원도 2점’을 직접 그렸는데, 천방후손들이 불민(不敏)하여 목판에 그만 ‘평(評)’으로 오기했지만, 존재선생이 직접 ‘작,화,제(作,畵,題)’ 했음에 틀림없다. 존재선생이 ‘연하동’을 직접 방문했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 살펴본다. 1798년경 존재 타계시점 보다 한참 늦은 <1819년 목판본>에 새겨진 ‘評’ 자체도 얼른 믿기지 않지만, 어쨌거나 목판에 새겨진 ‘評’을 일응 수긍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목판도는 회화적 의미와 거리가 있는 <서당위치도(略圖), 족보산도(山圖)> 수준에 불과하다. 존재 시점이면 ‘연하동 서당’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고, 단지 ‘폐허지’였을 뿐이다. ‘評’이라야 주관적 논평 관점이 아니며, 그저 ‘운(云)’을 전하는 단문에 불과하다. 요컨대, ‘위백규 유고수습說’을 일방적으로 과장한 것 말고는 ‘존재선생의 작화(作畵)설’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사정은 일절 찾을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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