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봉백광홍의 인간과 문학(1)
▶▶▶장흥군은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칭되고 있다. 2008년에 지정된 이 특구의 개념은 한 지역이 특산물이 아닌 ‘문학’의 정체성을 특구화하여 대내외적으로 선양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만큼 장흥의 문학은 정연하고 당당한 문맥이 이어지고 있으며 문학자원 또한 그 질량의 풍성함이 여타의 지역에 우선 하고 있다. 그래서 장흥의 문학, 문학사, 문학자원은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렇듯 차별성 있는 장흥의 문학 그 문맥의 시원을 논할 때는 어김없이 ‘장흥의 가사문학’과 이어서 기봉 백광홍의 관서별곡이 등장한다. 국문학사에서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로 일컬어 지는 기봉의 관서별곡은 장흥 문학의 자긍심이다.
이러한 기봉의 문학적 업적은 2004년 문화관광부에서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여 일련의 연구 작업을 진행하였다. 더불어 ‘기봉백광홍선생기념사업회’를 창립하여 지속적으로 기봉의 문학을 선양하고 연구하는 단체로 활동을 하여 왔다.
‘기념사업회’에서는 기봉집 국역 및 출판 기봉의 연구, 학술 자료 간행, 기봉 문학의 상징 조형물 제작 설치, 전국 대상가사문학작품공모 및 시상 학생 백일장, 가사문학 현장 문학기행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여 왔다.
2020년의 사업으로는 장흥 지역에서 가장 전통이 있고 유료 구독자가 많은 주간신문인 장흥신문과 연계하여 “장흥의 가사문학 다시 읽기-기봉 문학을 중심으로”라는 테마로  지면을 할애 받아 연재할 계획이다.
이 사업으로 장흥군민과 문학관광기행특구 장흥에 관심있는 독지와 문학도들에게 장흥의 문학사와 가사문학 기봉 백광홍의 문학적 업적을 ‘다시 읽는’ 계기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업은 기념사업회의 자부담과 장흥군의 지원으로 진행된다.◀◀◀
 

기봉(岐峯) 백광홍(白光弘, 1522~1556)은 조선 중기 호남 시단을 이끌던 이름 높은 시인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가사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의 작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2년 12월 1일의 기사에는 송익필(宋翼弼)ㆍ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그를 당대를 대표하는 8문장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런 그가 사후에는 문학사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아우인 백광훈(白光勳)의 시명(詩名)이 워낙 쟁쟁했던데 반해, 정작 기봉의 시문은 대부분 일실되어 간행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호남의 큰 학자인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교유한 인물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ㆍ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ㆍ율곡(栗谷) 이이(李珥) 같은 큰 학자가 있다.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ㆍ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ㆍ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등 쟁쟁한 시인들도 그와 문학적 교류를 계속 이어갔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기봉의 학문과 문학이 당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다.

생애의 세세한 부분은 책에 실린 ‘묘갈명’과 서발에 자세하므로 이에 미루고, 그 대체만을 간략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백광홍은 1522년(중종 17)에 장흥(長興) 기산리(岐山里)에서 부 삼옥당(三玉堂) 세인(世仁)과 모 광산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강학은 기록이 자세치 않다. 신사무옥으로 장흥에 귀양와 13년간 머물렀던 영천(靈川) 신잠(申潛)에게 나아가 학문의 길을 물었던 듯 문집에는 그와 관련된 시문이 특히 많다. 이후 신잠이 태인군수로 있을 때, 신잠을 따라 그곳에 가서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만나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김인후나 양응정 등과의 교유도 이때 이루어졌다.

이후 그는 28세 때 부명(父命)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하였고, 3년 뒤인 155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제수되었다. 호당(湖堂) 시절 왕명으로 영호남 문사들이 한자리에서 시예(詩藝)를 겨루었을 때, ‘동지부(冬至賦)’ 한편으로 그 도저한 학문과 문예를 인정받아 장원에 뽑혀 시명을 드날렸다. 이때 상으로 하사 받은 ‘선시(選詩)’ 10책이 지금까지 문중에 전한다.

이후 왕의 총애가 두터워 1555년 평안도평사(平安道評事)에 배수되어 변방에 나갔다. 하지만 이듬해 가을 병으로 교체되어 어버이 문안 차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안 처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누린 해가 고작 35년이었다. 그는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날개를 펴려다, 품은 뜻을 펼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떴던 셈이다. 이것이 그간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히고 만 연유이다.

실제 그의 문집도 간행까지는 참으로 험난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임병양란을 겪으면서 집안에 남아 있던 유고는 대부분 유실되고, 겨우 남은 것은 열에 한둘뿐이었다. 다행히 백광훈의 집안에 간직된 유고가 수습되었지만 책으로 묶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선생 사후 근 300년이 지난 1846년에야 후손이 홍직필(洪直弼)의 서문과 묘갈명을 받아, 상하 2책으로 문집의 모양새를 겨우 갖추었다. 이때도 여러 사정으로 간행은 되지 않은 채 문중에 전해지다가, 1860년 고부(古阜)에서 집안사람이 간직해 온 선생 친필의 ‘시산잡영(詩山雜詠)’과 관서 땅에 부임할 당시 제현들이 써준 수창시문의 친필본이 수습되면서, 기왕에 편집된 상하책에 이를 보태고, 여기에 ‘관서별곡’을 더하여 1899년에야 ‘기봉집’ 5권이 비로소 간행되었다. 실로 선생 사후 343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원고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원문 중에는 군데군데 누락된 부분이 적지 않고, 체제도 다소 어정쩡한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에 수습된 시는 권 1에 부장편(賦長篇) 9수, 권 2에 오언절구 10수, 오언율시 21수, 오언고시 3수, 칠언절구 58수를 실었다. 권 3에는 칠언율시 16수, 칠언배율 1수, 칠언고시 11수를 실었고, 권 4에는 ‘시산잡영’으로 각 체 46수와 ‘관서별곡’ 1수를 실었다. 권 5는 부록으로 제현들의 수창시와 만사 등이다. 결국 현재 남아 전하는 기봉의 시는 각체를 망라하여 175수다. 결코 많다 할 수 없는 분량이나, 간행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정성이 있어 이나마 수습될 수 있었다.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살펴보자. 스승인 이항(李恒)은 멀리 관서에서 학문의 가르침을 청하는 기봉에게 ‘거경궁리(居敬窮理)’의 가르침으로 일깨운 바 있었다. 기봉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이항은 “그의 재주와 행실이 그 짝을 찾기 힘들었는데, 불행히 명이 짧으니 능히 크게 펴지 못함이 애석하구나”하며 안타까워 했고, 양응정은 만사에서 “하늘과 땅 다하여 마침 없으니, 산은 높고 다시금 물은 깊도다. 유유히 이 인생에서 홀로 백아의 마음을 보았네”하며 그 죽음을 애도했다. 꿈에 그를 만난 후 깨어 지은 시에서는 “그가 세상을 뜨자 큰 붓이 꺾였다”고 술회하였다. 과거에 함께 급제했던 홍진(洪縝)은 장편의 만사에서 높은 도의(道義)와 맑은 절조, 그 보석같은 문장과 훌륭한 몸가짐을 기리면서 “사람들은 그대 위해 곡을 하지만, 나는 이 시대를 위해 곡을 하노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기대승(奇大升)은 ‘유상찬(遺像贊)’에서 “일재 선생 스승 삼아 문장으로 이름났네. 배움에 연원 있어 벼리를 꽉 잡았지. 홀을 들고 조정 서매 선비들이 뒤따랐지. 남 비방함 없었으니 원수 원망 산 일 없네”라는 말로 그 학문과 인간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권 1과 권 3에 실린, 매 구절 ‘서경’과 ‘시경’ 및 옛 경전의 인용으로 점철된 장편의 부(賦)와 칠언고시를 보면, 그 학문의 온축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 작품들은 유가의 기본 경전들이 머리 뿐 아니라 가슴으로 체화되어 삶 속에 무르녹아 이루어진 글들이다. 특히 그는 ‘인(仁)’의 정신을 유난히 강조하여, 거의 모든 부 작품에 인(仁)의 덕목을 되풀이하여 천명하였다. 특히 ‘오곡은 종자 중에 훌륭한 것(五穀種之美)’에서는 “모든 선의 으뜸에는 인(仁)이 가장 존귀하다. 오곡도 안 익으면 어여뻐도 예쁘잖코 인(仁)이 익지 아니하면 귀한 자도 천하다네”라고 했다. 그의 평생 학문의 종지(宗旨)가 바로 이 인(仁) 한 글자에 놓여 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만약 하늘이 그에게 더 긴 세월을 허락하여 학문에 종사하게 했더라면, 그 이르러간 경지를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봉 자신은 ‘상실무본(尙實務本)’을 학문의 기본 바탕으로 중시하였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즐기지 않고, “독서란 장차 자기를 위하려는 것이다. 만약 오로지 나아가 벼슬에 오르는 것에만 뜻을 두어 한갓 심장적구(尋章摘句)만 일삼는다면 무엇에 힘입어 경륜을 펼쳐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에 이르게 할 것인가?”라고 했다. 스스로 지은 ‘좌우명’에서 “부는 구할 수가 없고, 귀(貴)도 도모할 수가 없네. 구하지도 않고 꾀하지도 않으며 하늘 뜻에 따라 하리. 가난해도 근심할 것 없고, 천하여도 슬퍼할 것 없네. 담담히 빈 집에서 광풍제월(光風霽月) 벗 삼으리. 내가 누구를 믿을까? 저 높으신 상제(上帝)일세”라 하여 천리에 순응하며 부귀에 연연치 않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그저 근엄하기만 한 샌님은 결코 아니었다. 평안도평사로 나가 있을 때는 몽강남(夢江南)이란 용만 기생과 멋진 로맨스를 나누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고, 관련 시가 문집에 실려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지금도 관서의 기생들이 그의 풍류를 사모하여 반드시 백서기(白書記) 백서기라고 한다고 전언하면서, 관서의 기생들이 ‘관서별곡’을 노래할 때마다 눈물을 떨군 일을 적고 있다. 실제로 그의 시를 보면 질탕한 풍류의 면모를 짐작케 하는 시가 적지 않다.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리,요약/昊潭

“기봉집”해설

조선 중기의 시인 백광홍(白光弘)의 시문집으로 5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전래되고 있다.
병화(兵火)로 인하여 산실된 유문을 후손 진항(鎭恒)이 수집했다. 1866년(고종 3) 8세손 후진(后鎭)의 편집을 거쳐, 1899년 12세손 희인(羲寅)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권두에 홍직필(洪直弼)·백사(白師)의 서문이 있으며, 권말에 기우만(奇宇萬)ㆍ백후진ㆍ백채인(白采寅)ㆍ백희인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은 부(賦), 권2~4는 시로 오언절구ㆍ오언사운ㆍ오언고시ㆍ칠언절구ㆍ칠언사운ㆍ칠언고시와 시산잡영(詩山雜詠)·관서별곡(關西別曲), 권5는 부록으로 관서증별시(關西贈別詩)·만사ㆍ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는 「부귀재천(富貴在天)」 등 8편으로 모두 명문이다. 특히 ‘봉래산사(蓬萊山辭)’는 금강산의 여름철 절경을 읊은 것으로 대표적인 작품이다.
본집에 수록된 작품은 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로 되어 있다. 시는 대부분 경전에 기초를 두었다. 제가들의 문장을 음미하였으며, 표현이 자연스럽고 기교의 흔적이 없다.
스승인 이항(李恒)과 영천(靈川) 함담정(含湛亭)에 올라가서 달구경을 하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시의 운을 따라 지은 작품과, 도의(道義)로 교유했던 김인후(金麟厚)ㆍ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ㆍ정철(鄭澈)ㆍ양응정(梁應鼎)ㆍ최경창(崔慶昌)ㆍ이후백(李後白)ㆍ임억령(林億齡) 등과 수창한 시가 있다.
그리고 저자가 그의 아우인 광안(光顔)·광훈(光勳)과 종제 광성(光城) 등 ‘백씨사문장(白氏四文章)’으로 불리는 형제와 더불어 기잠(岐岑) 아래에서 글을 읽을 때 서로 수창한 시가 들어 있다.
‘관서별곡’은 저자가 1555년(명종 10) 평안도평사(平安道評事)를 역임할 때 관서지방의 절경을 보고 자연을 노래한 기행시가로 널리 애송되었다.
이 책은 16세기 한시연구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특히 「관서별곡」은 한글로도 전해오므로 국문학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비중 있는 작품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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