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쉬움 정도가 아닌, 문화적 비극일지 모른다. 장흥 후손들을 혼돈에 빠뜨렸다. ‘예양강’ 자리를 ‘탐진강’이 차지하고, ‘고읍면’ 자리를 ‘관산’이 대신하면서 역사적 망각은 시작되었다. 그 상실감이 컸다. 불과 100년 전에 생긴 일. 지명의 정체성(正體性)은 사람의 정체성으로 연결된다. 그 인식범위를 제약하고 사고체제에 영향을 미친다, 요즘은 신(新)도로명 주소로 더 악화되었다.

1. 예양강(汭陽江) - 조선시대 내내 ‘예양강’이었다. 강향(江鄕) 장흥을 오가며 ‘예양강’을 읊은 ‘옥봉 백광훈(1537~1582)’은 물론이지만, 외지방문객들 ‘김종직, 남효온, 신잠, 심동구 부자, 이하곤’ 등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읍지 정묘지(1747), 해동역사, 대동지지, 관산지(1910), 조선지지(1911),조선환여승람 장흥(1933)>에도 ‘예양강’이었다.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구강포로 들어간다.”는 요지로 설명된다. 물줄기의 개별구간 호칭이 있다한들 본류(本流)는 ‘예양강’이었다. 그 강변의 장흥 8정자 모두 ‘예양강’을 노래했다. 1932년에 세워진 막내 ‘독취정’ 시문에도 ‘예양강’이었다. 그러니 8정자 시문을 국역할 때 원문 ‘예양강’을 대뜸 ‘탐진강’으로 풀기보다는 “예양강(현 탐진강)”으로 옮겨야 합당할 것. 그 ‘예양강(汭江, 汭水, 汭川)’은 ‘예수탕탕/양양/도도/명/벽(蕩蕩/洋洋/滔滔/明/碧), 예양강대수(大水)’로 표현되었다. 그 강변에 ‘汭陽(예양)서원’이, 南쪽에 ‘경주김씨 汭南祠’가, 東쪽에 ‘汭東정사, 汭東재’가 있었고, ‘汭東, 汭隱(은)’을 호(號)로 삼기도 했었다. 현재의 행정명칭 ‘탐진강’은 1910년경 일제의 <조선수로조사 지형도>에 최초 등장하였고, <장흥읍지 무오지(1938)>에 ‘탐진강’으로 등재되었던 것. 혹자는 “장흥 사인암을 지나면 강진 탐진강이다, 강진에선 탐진강이라 불러왔다.”고 오해하지만,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강진읍지>를 살펴보라, 거기에 ‘탐진강’이 나오던가? ‘탐진강’을 읊은 옛 강진시인 시문이 있던가? 고려시대에 장흥 관할지였던, ‘현 강진만(灣)’의 양안에 걸쳐있던 ‘탐진현’ 지역이 조선 초 장흥에서 분리될 때야 신설(1417)된 강진군에 이속된 만큼 ‘탐진현’의 북동쪽 일부에 불과한, ‘사인암 ~ 구강포’ 구간을 ‘탐진강’이라 칭하기도 어려울 일. 유배객 정약용의 <탐진어가>에도 ‘탐진강’은 없다. “탐진(耽津)은 탐(耽)나라 왕자가 강진(康津) 나루터를 거쳐 신라를 오간데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납득되지 않는다. 고대의 제주도 ‘탐나라’와 조선 초에 창군된 ‘강진’이 서로 겹칠 수는 없을 일. 오히려 육지 남단에 있는 ‘탐진’의 ‘탐’에 대해 북쪽에서 내려온 세력이 먼저 남긴, ‘담,담로/둠,돔,도무’ 계열의 옛 지명흔적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나중에 장흥 강진이 통합된다면 현 ‘탐진강’이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한때 장흥중고등학교의 경쟁력이 그 강을 거슬러 온, 강진 출신의 유학생에 힘입은 바도 컸었다.

2. 별호 관산(冠山) - 1932년에 ‘고읍(古邑)면’을? ‘관산면’으로 개칭함은 ‘사건’이었다. ‘장흥府 관산’이란 역사적 전통을 일거에 축소해버렸다. ‘작은 고읍면’이 ‘큰 장흥군(관산)’을 삼켜버린 셈. 예컨대 ‘보성=산양/강진=금릉/진도=옥주/영암=낭주’처럼 ‘장흥별호=관산’이었다. (그 별호는 ‘천관산’에서 왔을 것) 그럼에도 그 ‘장흥별호 관산’을 일제가 1932년에 장흥부군(府郡)에 부속되어온 면방(面坊) 단위 ‘고읍면’ 수준으로 끌어내려 버린 것. 지명의 강등이었다. 돌이켜 보시라, 옛 시문기록에 등장하는 사례, “관산록(錄), 관산관, 관산 평근당, 관산행단(杏亶), 관산동정(東亭), 관산동교(東橋), 관산적소(謫所), 관산여사(旅舍), 관산사군(使君), 관산도중(途中), ‘진천관산 南北州’, 관산任씨, 관산魏씨, 관산之鄕, 관산之南, 관산之側 新廟(연곡), 관산之고읍, 관산之기산, 관산之월천, 관산구로회, 임계탄 관산”의 ‘관산’은 어느 ‘관산’이겠는가? ‘장흥부=관산’일 뿐이고, ‘고읍 관산’이 아니다. ‘관산途中’은 때론 ‘천관산 줄임말’에 해당할 수 있겠다. 남면(용산)출신 ‘지지재 이상계’가 주도했던, ‘관산 구로(九老)회’는 결코 ‘고읍 관산(현 관산읍)’ 출신자로 한정되지 않았다.
장흥府의 각 면방 출신들이 ‘별호 관산’ 이름 아래 모였던 것. 한편으로 ‘천관산(天冠山)’ 줄임말로서 ‘관산(관악)’이야 물론 계속 사용되어왔지만, 조선시대 행정지역으로는 내내 “장흥=관산”이었던 것. 1910년경 <장흥읍(군)지 경술지>의 별칭도 <관산지(冠山誌)>이었는데, 그만 1932년경에 크게 뒤틀려 버린 것. ‘고상면, 고하면’이 다시 합쳐진 ‘고읍면’을 느닷없이 ‘관산면’으로 개칭한데서 착종(錯綜)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점차 “관산=장흥부”는 까먹고 “관산=고읍면”에 길들여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옛 시문의 ‘관산’을 마주치면 오히려 ‘고읍 관산’으로 간주할 지경이 되었다. ‘장흥위씨 관산파’ 사례도 그러하다. ‘장흥(수녕, 관산) 위씨’에 속하는 ‘古邑종중/ 행원종중’등으로 대비되다가 이윽고 ‘古邑종중’은 없어지고, 곧장 ‘관산종중, 관산파’로 통칭되는 것 같다. ‘古邑면 古邑’은 <정묘지, 古邑방> 내용이 그러했듯, 지역적으로는 ‘현 관산읍’ 일대를 지칭하는데, 원래 고려시대 ‘장흥府, 회주牧’ 시절에 천관산하에 있었던 치소가 조선 초에 ‘수녕현(현 장흥읍)’으로 옮겨지면서 그 터전이 ‘古邑’으로 남게 된 것. ‘백광홍, 백광훈’은 당시 아저씨(叔) 관계의 ‘위곤’ 진사宅이 있는, ‘관산之古邑’을 오갔으며, 전라관찰사 ‘구봉령’은 ‘古邑원(院)’을 지났으며, ‘영이재 위문덕’은 <古邑방 산천총도>를 남겼다. 마무리 하면, 조선시대 옛 시문기록에서 <관산(冠山)>을 마주치면, ①‘장흥府 별호로서 冠山 장흥’ ②‘천관山 줄임말로서 冠山 관악’ ③ ‘1932년경 고읍面을 개칭한 古邑 冠山’ 경우를 반드시 분별할 일이다. <가사 임계탄>에 나온 ‘임계년간 冠山’ 역시 ‘장흥부 관산’의 일을 노래한 것이지 결코 ‘고읍면 관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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