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정관할의 이속ㆍ변경 - 사람들 역사는 땅의 역사이기도 하다. 장흥府는 고려말 왜구침입으로 나주 철야현 등에서 10여년 피난살이 후에 1392년경 장흥府 중녕산 황보城으로 돌아왔는데, 조선 개국을 반영한 행정관할 개편으로 그 영역이 축소되었다. 돌이켜 장흥府 영역이 고려 때에 ‘현 강진군일부(탐진현), 장흥府, 현 보성군일부(웅치면, 회령폐현), 현 고흥군일부(두원현, 도양현)’ 등으로 넓혀진 것은 ‘공예태후 고향승격, 왜구침입의 파급효과, 장흥府 호족의 특수산업(자기업, 다업)’등 때문이었을 것. 장흥府 공물은 ‘장흥倉’ 해로와 ‘벽사道’ 육로로 개경에 연결되었다. 장흥府 관할조정으로 ‘탐진현’은 1417년에 강진에 이속했고,(강진은 고려 때엔 없다가 조선 초에 창군되었으니, ‘강진 고려청자’가 아니라. ‘장흥府 탐진현 고려청자’가 옳은 명명이다) ‘두원현/도양현’ 지역은 세종23년에 흥양(고흥)에 환속했다. (고려 때 보성에서 장흥府로 이속된 ‘회령폐현’ 지역은 계속하여 장흥 땅이었다가, 일제시기 1914년에야 보성에 이속했다) 위 변천내역은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장흥府, 보성군, 고흥(흥양)현’ 등에서 확인된다. 그에 따른 ‘폐현(廢縣),향,소(鄕,所)’의 이동내역에서 ‘장흥府 다소, 가을평所’의 유래와 위치가 가늠된다. 비록 땅은 어느 한 곳에 있다한들 그 땅 사람들은 그 땅 명칭과 함께 옮겨 다녔던 셈.
2. “다소 가을평所”의 중복 - 장흥府 기록에 ‘가을전鄕/가을평所’가, <흥양현 기록>에 ‘가을전鄕’이 등장하지만, 보성군 기록에는 그런 명칭이 없다. 돌이켜 ‘장흥, 보성, 흥양’ 3곳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 때 왜구침입을 먼저 받은, 흥양(興陽)과 남양(南陽) 쪽 ‘가을전鄕’이 ‘보성 속현’에 일시 편입되었다가 고려 당대에 다시 ‘장흥府 관할’에 이속되었던 것. (허흥식 교수의 ‘서쪽 이동설’을 지지한다) 한편 요즘 보성논자들이 “그 내역을 모르겠다.”고 언급한 <보성군 기록> 쪽의 일부 ‘폐현(태강, 풍안, 도화)과 부곡(部曲), 所’ 역시 고려 때에 원래 속했던 흥양 쪽에서 그 서쪽 보성으로 밀려났다가 조선 세종 때에 다시 흥양현으로 되돌려진 것. 보성군 기록에 명칭만 남은 ‘신통所, 조(작)도所, 고다산部曲, 저(서)천部曲’ 등은,(장흥府 기록에 등장한 ‘가을평鄕’과 함께), <신증, 흥양현>에 다시 등장하고 있으며, “원래는 남양(南陽)에 있었다.”고 했다.

3. 고려 장흥府의 “향ㆍ소” 개편, 소멸 -<세종지리지, 장흥府>에 나온 6鄕, 13茶所, 2所 체제는 <신증>에 이르러 향(鄕)은 방(坊)으로 개편되며, ‘다소 웅점所 <웅치坊’, ‘다소 안칙곡 <부산坊’. ‘다소 창거소, 거개소 <용계坊’으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흡수 또는 소멸되었다. 그렇다면 <세종지리지, 장흥府>에 장흥 6鄕에 포함됐던 ‘가을전鄕’ 위치는 어떠했을까? 고려 때에 보성에서 장흥으로 이속된 ‘회령폐현’에 대응한, ‘장흥府 회령坊, 천포坊’으로 조선 내내 존속했던 바. <신증, 장흥府> 기록에는 “가을평所는 장흥府 동쪽 31리에 있다”고 했다.

4. 장흥府 회령방, “다소 가을평所” - 보성논자는 ‘장흥府 13茶所’와 ‘다소 웅점所’를 부정했다. 대신에 ‘웅치면 약산’을 ‘가을평所’로, ‘보성군 포곡所’를 ‘보성 茶所’로 주장했다. 이에 반박한다. 그는 우선 거리와 방향을 왜곡했다. 매10里/4km기준을 적용했지만, 불균일한 주척(周尺)으로 ‘4.7km,5.7km,6.1km’ 등 편차가 있었으니 대략적으로 10里/6km가 안정적일 것. (옛 기록에 표시된 거리자체도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세종지리지, 보성군>에 나온, 보성의 ‘남쪽 10里’ 경계에 유념치 아니했다. 그는 애초 ‘가을전鄕/가을평所’가 ‘남양폐현 또는 두원(荳原)’의 ‘가을전鄕’에서 유래되어 일시 ‘보성 속현’을 거쳤다가 고려 당대에 ‘장흥府 회령방’에 최종 정착된 과정을 간과하였다. 그러니 <보성군 기록>에 남은 ‘南20리 적(추)촌鄕/ 南20리 포곡所’를 두고 “처음부터 보성 땅에 있었다.”는 오해를 하게 된 것. 그러나 ‘적(추)촌鄕, 포곡所’ 존재는 장흥府에 넘겨지기 전에 일시 존재했던 명칭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세종지리지 보성군/신증>의 남쪽 경계로 ‘보성의 南10리’가 장흥府와 경계였던 것이니, 그 南10리를 넘어선 南20리에 위치한다면 응당 ‘장흥府 회령방’ 지역에 속하는 것. 또 <장흥府 기록>에 “장흥府 東30리 또는 東31리에 ‘가을평所’가 있다”고 했으니, 역시 장흥府 東쪽 회령방(현 회천면) 지역에 해당한다. 설령 ‘南20리, 추촌향/ 포곡소’를 본래적인 보성 茶所로 오해한데서 보성논자가 ‘회천면 양동(樑洞)’을 ‘가을평所’로 넘겨짚을 수 있을지언정, 달리 ‘현 웅치면 노원(蘆原) 약산(藥山)’을 두고 ‘보성 가을평所’로 참칭할 수는 없을 일.

 5. 어쨌거나 “보성 뇌원茶”는 없었다, 없다. - 장흥府 13다소 위치를 어떻게 보든지, ‘다소 웅점所, 가을평所’가 어디에 있는지에 상관없이, 이른바 보성 뇌원茶는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가을평, 갈대밭 <노원(蘆原) <뇌원(腦元) <뇌원茶”라는 명칭유래를 입론하지만, 그 어떤 문헌적 물증적 근거도 제시 못했다. ‘갈대밭, 갈밭, 갈림길’ 등을 지칭한 ‘노(蘆)/갈(葛)/가래(楸)자’ 지명은 전국적으로 빈번한데, ‘노(蘆)<뇌(腦)’ 전이사례는 없다. 허흥식 교수가 풀이한, ‘고흥 두(荳)원< 두(荳<頭,머리<뇌) <뇌(腦)원說’은 ‘고흥, 보성, 장흥’에 걸쳐 나타나는 ‘두원(荳原)縣’ 세력의 이동경로에 부합한다. 허교수 견해에 동의하며, 필자는 ‘뇌(腦) 茶藥’ 성격(‘생강’ 약재의 腦각성효과)을 보태본다. 마침 ‘생강(薑)’이 장흥府에 기록된 토산(土産) 품목의 선두이고, ‘고흥 두원(荳原)’은 원래 ‘신라 강원(薑原)’ 지명에서 유래했었다. <고려사>에는 老臣에게 ‘茶藥’을 하사하는 기사가 꽤 있다. 옛 역사를 망각한 채, ‘장흥府 13茶所, 보림사 茶藥, 청태전’ 전승을 통째로 부정하는, 그들 태도가 안타깝다. ‘녹차수도 보성군’이 복원하려는 이른바 보성 뇌원茶는 장흥 청태전의 ‘각(角)형 변종 떡차’에 해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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