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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장흥 인물, ‘창령曺씨 曺수’예강칼럼(133)/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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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25  10:3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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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지리지, 장흥府>에는 고려 인물로, 장원급제자(탁괴,擢魁) ‘曹정통(精通)’이 있는데, 그 후손에 ‘曺수’가 있었다. <정묘지>는 ‘曺희정’을 ‘曺정통의 4세손, 官목사’로, ‘曺수’를 ‘曺정통~曺희정을 잇는 후손’으로 기록했다. 마침 강진 쪽에는 ‘수운 曺정통’으로 짐작되는 ‘曺精(조윤통)’이 있는데 아마 옛 징흥府 ‘탐진현’ 출신이었을 것 같다. 장흥府에는 조선초 인물로, ‘호장(戶長) 조수(曺修)’와 ‘불사(佛事)후원자 조수(曺隨)’ ‘장흥건산 입향조 좌랑 조수(曺璲)’ 이야기가 따로 전해진다. 한편 <정묘지>에는 ‘회주(懷州), 수녕(遂寧)’의 성씨로 ‘창녕曺씨’가 나오며, 조선 초에 있던 ‘장흥曺씨’는 대본(大本) ‘창녕曺씨’로 흡수되었을 것. 이하 ‘장흥사람 曺수’의 여러 행적을 모아본다.

1. 호장(戶長) 曺수- 1392년경 장흥 벽사역 유배객, ‘목은 이색(1328~1396)’은 <중녕산 황보성記>에 당시 황보城 축성 작업을 주도한 장흥府 지역 4戶長으로 ‘호장 曺수(修)’를 거명하였다. ‘검호군 曺한귀, 영동정 曺생철’ 이름도 함께 나온다. 그러니 장흥府 창녕曺씨는 아마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에 걸쳐 장흥지방의 토호세력이었을 것. ‘이색’의 부친 ‘가곡 이정(1298~1351)’은 장흥출신, ‘절부 曺씨傳(1341)’을 남겼다. 장흥에서 1265년에 태어난, 절부 曺씨는 남편과 시아버지를 그 무렵 전쟁터에서 잃고 50년 수절을 하였다한다.
2. 백련사 후원자 曺수 - 조선 초 1420년경 무렵에 ‘효령대군(1396~1486)’의 지원으로 강진 ‘탐진현’의 ‘백련사’ 중창불사가 있었는데, 그 불사를 진행했던 ‘행호(行乎, 속성 해주崔씨)’ 스님을 ‘장흥府 사람 曺수(隨)’가 적극 후원하였다. ‘행호’ 스님은 장흥 천관산 ‘수정암(修淨庵)’ 불사도 일으켰다.

3. 장흥 건산(巾山) 입향조 曺수 - ‘존재 위백규(1727~1798)’는 장흥의 죽산安씨 집안 후손에 관한 <여경화(餘慶花) 說>에서 장흥 입향조 ‘安여주(汝舟)’와 ‘曺좌랑 曺수(璲)’의 관계를 언급했다. 죽산인 ‘安汝舟’는 ‘장흥曺씨 曺수’의 사위로 장흥에 입거했는데, “장인 曺수가 ‘창거건산(創居巾山)’하였다.”는 것. <정묘지>는 “安여주, 安氏之居 本府始此(시차)"라 했다. ‘安여주’는 아들 ‘安도,安민’,‘손자安범(1460~1523)'을거쳐,’안수륜(1483~1517),안수금(1488~1542),<안정(艇),<동애 안중묵(1556~1607),<남파 안유신(1580~1657)’으로 이어졌다. 장흥 입향조 ‘安여주’ 묘소는 장흥 용계방 만수원洞에, ‘안유신’의 묘소는 남(용산)면 포곡에 있다. ( <정묘지 부동방>에는 安씨 무반인물도 꽤 등장한다. 훗날 1960년경 <장흥 모습지, 천관>은 安씨 집성촌으로 ’장동면 우봉, 장흥읍 우목, 巾山’을 지목하며, “巾山에 安씨 215호, 타성 626호”라 했는데, 장흥읍 巾山의 그 많던 安씨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4. 건산(巾山) 대야평 소유자 창녕曺씨 - ‘존재 위백규’보다 한 세대 후대인 ‘계서  白진항(1760~1818)’은 <계서유고>에서 건산(巾山) 앞 ‘대야평(보)'을 수원白씨가 차지하게 된 내력을 말했다. 원래 ‘大野坪(한들)’은 무남독녀를 둔 ‘曺수’의 소유로 그 사위 ‘덕원군 李서(1449~1498)’에게 주었는데 다시 그 사위 ‘安수금(安여주 증손, 운산군수)’을 거쳐 다시 그 손녀사위 ‘시정공 白승종(1550~1622)’에게 넘어갔던바, 결국에는 ‘2남, 직장공 白민수(1577~1615,장인이 남평文씨 文위세)’와 ‘3남, 낭청공 白민각(1581~1623, 장인이 장흥魏씨 魏덕홍)’에게 상속되었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장흥 巾山 쪽에 직장공파와 낭청공파 白씨들이 살게 되었다는 것. 돌이켜 창녕曺씨 ‘曺수’가 소유한 ‘巾山 대야평’은 사위 죽산安씨로, 다시 사위 수원白씨로 사위물림이 되었던 것. 그렇게 얽힌 ‘曺, 安, 白, 文, 魏’는 그 시절 유력 집안의 혼맥을 보여준다.

5. <정묘지,1747>에 기록된 “좌랑 曺수” - <정묘지, 부동방>은 ‘인물’ 편에서 ‘曺희정’의 후대, ‘조수(曺璲)’에 대하여, “官좌랑, 창거건산(創居巾山)"이라 했는데, <정묘지, 총묘> 편에 ‘曺수’ 묘소는 기록되지 않았다. 과연 ‘曺수’ 묘소 묘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 옛 ‘장흥府 탐진현’ 연고지로 돌아갔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외손봉사(外孫奉祀)’를 하다가 실묘(失墓) 했을까? 궁금하다.  이에 정리해보면, 앞서 등장한 “여러  曺수(修, 隨, 璲)”는 ‘활동시기 및 범위, 巾山 관련성, 혼맥 관계’ 등에 비추어, “한 사람 曺수”로 판단된다. 그런데 <정묘지,1747> 시점이면 이미 巾山에 曺氏村은 없었던 것 같다. <정묘지> ‘마을’ 편에 나열된 ‘巾山 7姓’에 曺씨는 없다. 장흥府 창녕曺씨 연고지로는 현재 ‘장흥읍 평화, 안양면 요곡, 장평면 제산’ 등이 있다. 1521년경 장흥유배객 '영천 신잠(1491~1554)'이 장흥에서 대면한 인물로, <관산록>에 등장한 ‘曺보(曺석견의 아들)’는 장흥읍 평화 쪽의 창녕曺씨였고, 지금도 선대묘소들이 있다. 장흥향교 <사마재 제명록>에 기록된 ‘생원 曺여해’는 曺정통의 후손이라 했다. 1567년 생원 ‘취곡 曺여흠(1549~1579)’은 안양방 인물로 ‘봉명정 중수기’를 남겼다. 그 아들 ‘曺장일(1595년 전사)’의 처 李씨는 정유재란 때 왜구들에 지킨 절개로 ‘원주李씨 정려각(1613)’으로 모셔졌는데, 장흥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정묘지, 용계방>에는 1642년 생원 ‘이취당 曺덕길(1604~ )’과 그 형 ‘효자 曺덕간’이 있었다. ‘반곡 정경달(1542~1602)’은 그 <난중일기>에도 등장한, 회령坊의 친구 ‘曺길원’에게 보낸 詩5편을 <반곡집>에 남겼다. 또한 <정묘지, 회령방>에 ‘남행, 참봉 曺문기’와 그 아들 ‘효자 曺천건’이 나온다. 조선후기 개화기에 활동했던 보수적 인물로, 창녕인 ‘조동승(曺東承, 취곡 조여흠의 10대손 )’도 있었다.

이 글의 曺씨 인물들에 대해 <족보> 확인을 못했다, 장흥지방의 여러 토반 성씨들의 족보를 모은 <족보자료관>이 있었으면 한다. 650여년 전, 조선 초 장흥先人 ‘창녕인 曺수’의 흔적을 다시 맞추어 보았다. 흠향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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