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녕인 “曺수(修,隨,璲,琇)”와 “曺휴(休)” - 지난 칼럼에 언급한, 조선초 인물 ‘창녕曺씨 曺수(修, 隨, 璲)’는 그 집안족보에 “曺休(一云 曺琇), 官 좌랑, 묘소-부평방 일월谷 有표석”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 ‘曺휴(休)’와 ‘曺수(修,隨,璲,琇)’는 같은 인물이었다. (‘休’를 ‘수’로 읽었다는 견해도 있다) ‘조정’과 ‘조정통’은 항렬차 있는 선후인물이었다. 아직도 궁금한 장흥先人들이 있음은 물론이다. <정묘지 웅치방>에 묻힌 ‘魏장군 묘’는 누구이며, ‘영천 신잠’이 <관산록>에서 요절(夭折)을 애통하게 여긴 제자 ‘김옥강(玉剛)’은 어느 집안일까?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도운 ‘조선감 김세호(世浩)’는 김해김씨, 어느 마을 출신이었을까? 이에 제언한다. <정묘지>에 기록된 ‘장흥 토성’과 ‘22개 이래(移來)성’을 포함한 40여성 족보를 비치한 <족보자료관>을 마련하면 어떠할까? 옛 시절 향토인물의 생몰년, 묘소위치를 통한 지명유래, 당대혼맥에 실린 집안교류, 장흥선비들 문집내용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정묘지>등 장흥읍지에 <집안족보>를 보충한다면 더 신선한 사실과 사연, 당대 사회상을 알 수 있을 것.

2. “영천 申잠”이 말한 “分派自吾宗(분파자오종)” - 1521년 장흥유배객 ‘申잠(1491~1554)’은 유배초기에 장흥사람 ‘조보(曺輔)’에게 “分派自吾宗”이라 말하였다. ‘申잠’의 <관산록>에 조보(曺輔)’ 신원 언급은 없는데, <창녕曺씨 족보>에 을묘년(1504) 진사로, ‘부 조석견, 조부 조여해’의 자손이었다. 낯선 땅에서 아직은 불안하던 차, ‘고령申씨 申잠’은 그 말벗 ‘창녕조씨 曺輔’에게 읊었다.

“輔之見烏次(보지견오차) / 장흥 땅에서 ‘曺輔’를 만났는데,
分派自吾宗(분파자오종) / 우리 ‘고령’에서 나온 분파로구나.”
도대체 무슨 뜻인가? 창녕曺씨와 고령申씨 간에 무슨 역사적 인연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 <曺輔 집안족보>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 ‘曺輔’의 母親이 마침 ‘申잠’의 ‘고령 申氏’이기에 “曺보, 당신은 고령 申씨에서 나온 고령 분파 아니냐?”는 우스개 표현을 하였던 것. 장흥읍 평화리 후등 포치(蒲峙)에는 曺輔와 선대 묘소들이 지금도 모셔져 있다. <관산록>에 등장한 ‘梁진사(제주), 卞진사(초계), 朴진사(진원)’는 <정묘지> 또는 그 <집안 족보>로 확인되고 있다.

3. <청강유고, 이승(李昇)>에 실린 “만시 2편, <名缺>”은 누구인가?
1) 挽金公 <名缺> - “이름은 알 수 없다.”
無愁村近菟裘洞 / ‘무수村’ 가까이에 ‘토구(菟裘)洞’ 있어
匹馬曾鼓松竹門 / 필마로 일찍이 ‘松竹문’을 두드렸다네
美酒佳肴惟記憶 / ‘미주가효’ 잔치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不堪斜日送殘魂 / 석양에 지는 혼백 차마 감당 못하겠네.

-“金公”은 누구인가? ‘송천 김응규(1542~1620)’로 ‘오우당 김응원(1569~
1638)’의 형으로 짐작된다. ‘무수(無愁)촌, 무수(舞袖)산’은 ‘무쇠촌, 수철(水鐵)점’에서 유래한 것으로, 옛 부서방 평장리 김안마을, 옛 ‘토구동’ 부근에 있다. 경주김씨 김희련(1510~1573)의 아들 ‘김응규, 김응원’ 형제는 정유재란 때에 왜구를 퇴각시킨 ‘각왜동’ 일화로 알려져 있다. ‘도고동’은 ‘토구동’을 순화시킨 명칭. 시문에 나온 松竹은 ‘오우당 김응원’의 ‘五友’에도 들어간다. 경주金씨 선영이 마침 용산(남면) 운주동이라 ‘청강 李승(1556~1628)’은 더 알았을 것.

2) 挽魏公<名缺> - “이름은 알 수 없다.”
三丙辰生一戊午 / 세 사람은 병진생, 한 사람은 무오생으로
四人心只一人心 / 네 사람 마음 오직 한 사람 마음이었네
三人已去一人在 / 세 사람은 벌써 떠나고 한 사람만 남으니
每憶平生淚不禁 / 항상 그리워하며 평생 눈물 금치 못하네. (역 이병혁)

-“魏公”은 누구인가? ‘3丙辰(1556)生’에 ‘1戊午(1558)生’이 모였다. 같은 용산 하금의 1556년생, ‘인천李씨 李승, 영광金씨 金여중’이야 바로 짐작된다. ‘청강 李승(1556~1628)’은 1606년 진사이고, ‘헌헌헌 金여중(1556,6~1630)’은 1591년 진사였다. 그러나 정작 ‘李승’은 위 輓詩 작자에 무관할 것 같다. “세 사람은 이미 가고, 이제 한 사람만 남았다”는 사정은 그 마지막 생존자가 언급할 수 있는데, ‘金여중’이 ‘李승’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金여중’이 쓴 輓詩가 그만 ‘李승’의 <청강유고>에 실린 것은 아닐까? 위 詩題의 ‘魏公’은 ‘魏덕후(1556~1605)’일 것 같다. 다른 丙辰생으로 ‘동애 안중묵(1556~1607)’과 1589년 진사 ‘칠원윤씨 윤회(1556~?)’가 있다. 그렇다면 ‘남은 戊午생 1인’은 누구인가? 역시 첫 조건은 ‘金여중’보다 먼저 타계해야 한다.
그러니 ‘魏정망(1558~?), 魏홍주(1558~1634)’는 아니다. 魏덕홍의 아들 魏정망은 1591년 생원으로 1636년과 1644년 생존기록이 남아있다. 그 4인 모임에 항렬차 있는 ‘魏씨 족숙’이 참여함도 부자연스럽다. 그 一人心, ‘戊午생 1인’은 누구인가?

3) ‘헌헌헌 金여중’이 기린, ‘반세정친(情親) 李승’을 위한 輓詩
一里東西共卜隣 /한 마을에 동쪽 서쪽 함께 터 잡고, 追歡半世信情親 /즐거운 반생 참으로 믿은 ‘정친’이었네不將雲雨隨時態 /무상한 구름비 같은 세태 따르지 않고相許金蘭契我眞 /서로 ‘금란’을 허락하며 진심을 맺었네
儀表忽驚長入夢 /본보기 되던 분 홀연 놀랍게 돌아가시니屋樑那忍每傷神 /달빛 아래 들보에서 어찌 차마 슬퍼할까門란賴有諸孤在 /문 난간 의지해 여러 아들 남았으니時復摩사慰故人 /때로 다시 어루만져 ‘고인’ 위로하려네. (역, 이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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