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海波) 위향량 서예가는 1950년 장흥군 안양면 비동 동촌길 200여년 된 고택에서 서당(書堂)을 열어 후학들을 지도하시던 조부 병은(屛隱) 위찬식 선생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 유헌(裕軒)위계현 선생의 장손으로 교육적인 분위기의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묵향을 느끼며 성장했다. 호남의 대학자들을 배출한 장흥위씨(長興魏氏) 명문 집안의 후예이다.

1971년에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고 약 20여년간의 군 생활은 그가 염원했던 서예에 대한 집착을 잠시 접었던 시기였고 영관(領官) 장교로 전역하여 독학하던 시기를 지나서 1996년 초에 스승 효정(曉丁) 권인호 선생의 사사를 받게 되면서 서예에 대한 새로운 경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고 미술협회의 부산미술대상전, 한국인터넷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기타 많은 서예 대전에서도 좋은 성과를 올렸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초대 작가로 국전심사위원과 미협서울미술대상전, 부산미술대상전 등 크고 작은 미술대전의 심사위원을 거치며 본격적인 서예가의 길에 들어섰다.

해파(海波) 위향량 작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수서성당, 돈암동성당 등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평소의 지도지침 속에서 초학자들에게 강조한다. 즉 초학자가 수많은 서예 이론가들의 뜬구름(예를 들면 구름이 일고, 범이 춤추며, 용이 날아가는 듯한 글씨) 잡는 서예 이론에 빠지지 말고 오직 서예가는 기능공이라고 생각하고 고전 법첩을 통해서 끊임없는 연습과 임서로 기예를 연마하고 숙달하기를 강조한다. 아무리 머릿속에 오묘한(?) 서예 이론이 들어있어도 최종적으로는 숙달된 기능공처럼 손이 해결해 주기 때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자신만의 지도방법을 아낌없이 전수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파도와 같이 거칠고, 무거우며 때로는 솜털처럼 가볍고 섬세하다. 평소에 서예는 문자를 화선지에 배치하는 미적방법이 결국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해서 물감이나 먹물을 칠하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하며 서화동근 이라는 옛 선인들의 생각에 동조해서인지 문인화를 우송헌, 김영삼선생에게 사사하고 연마하고 있으며 그의 특유의 거칠움은 사군자와 같이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상호조화를 이루는 서예가가 되고 싶었을 듯하다. 서예와 사군자(문인화)에서 이렇게 현재 최고의 대가 선생님과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었다고 늘 말하고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재주와 끼를 선생님 복으로 돌리고 있다.

그는 70이 넘어서 200년이 넘는 고택을 지키고 계시는 부친을 봉양하기 위해 서울 자택을 비워놓고 부인 차정옥여사와 같이 산좋고 물맑은 사자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안양면 비동리로 따뜻한 색깔의 2층 벽돌집을 새로 지어 2년전에 귀향했다.

마을 입구에는 조부 병은(屛隱)선생께서 국이기운 구한말 서당을 열어 동네를 개화시킨 고마움과 그 공을 기리기 위해서 선생의 제자들과 동네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공덕비가 마을 앞에 우뚝서서 마을을 빛내고 있다.

이러한 선조와 조부의 대를 이어서인지 수년전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 조선왕조실록 태백산 사고에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는 휘호를 기증하고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시 교황방문 준비위원(예산분과)으로 활동하면서 교황님의 성구(聖句)인 종아(從我) “은혜로이 나를 부르시네”를 한국 전통기법으로 써서 표구하여 선물하는 등 작품활동과 천주교서울대교구 비봉 103위 성인추모공원의 책표제 비봉(飛鳳)을 선물하고 동추모공원의 장례예식 봉사를 10여년간 서울에서 화성까지 매주 1회 이상 다니며 자원 봉사했다.

지금 그의 소박한 꿈은 대를 이어 이곳 3개의 담수(비동지, 당암지, 복단지) 1개의 염수(풍길로 들어오는 바닷물) 즉 4개의 물들이 조망되어 공자님의 고향 사수(四水)를 닮은 비동 동촌길 집에서 자신이 익힌 서예기법을 전수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하고 상시 작품을 전시하여 찾아오는 모든이에게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그것을 통해서 장흥에 격조 높은 묵향이 널리 퍼지는 소박한 꿈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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