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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차 남평문씨 3형제’에 관한 몇 이야기예강칼럼(140)/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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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1.20  11: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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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향토사 이해에 필수적인 역사적 인물들이 있다. 그 시절 장흥 땅에서 솥(鼎)의 세 발처럼 가까이 살면서 ‘척령(鶺鴒) 우애’를 보였던 남평문씨 3형제들이 있었다. 1차, 2차는 편의적 구별이지만, 그 문씨 3형제를 알면, 그 당대 무렵의 <기봉집/ 옥봉집/ 반곡집>의 시문을 더 이해할 수 있다. 문씨와 백씨형제들 교류는 돈독했고, 또한 1차 문씨3형제 후손들은 임진정유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차 문씨형제는 부 문량, 모 해남윤씨(남동생이 ‘귤정 윤구’)의 자식들이다. 첫째 ‘춘정 문위천(1529~1573)’은 ‘자,백장(伯章)’, 부산 춘정파, 아들 ‘순거 문희개(청영정,1550~1610)’, 손자 문익명(1577~), 후손 ‘문필동’은 ‘담헌 이하곤(1677~1724)’의 <남행록>에 ‘부춘정’과 함께 언급된다. 둘째, ‘읍청정 문위지(1532~1610)’는 ‘자, 중장(仲章)’, 현 보성 천포파, 아들 문영개, 후손에 ‘진사 문덕경’이 있다. 셋째, ‘풍암 문위세(1534~1600)’는 ‘자, 숙장(叔章)’, 풍암서실, 1567년 진사, 유치 늑룡파. 아들 문원개와 문형개가 있고, 실직 파주목사를 제수하였으며, 그 후손에 ‘덕(德) 돌림자, 2차 문씨3형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1521년경 장흥유배객, ‘영천 신잠(1491~1554)’의 <관산록>에 문씨형제들은 나오지 않았다. 남평문씨와 해남윤씨의 인척관계에, 또한 ‘귤정 윤구’와 절친한 ‘신잠’이기에 문씨형제들을 가르칠 법 했겠으나, 1538년에 해배된 ‘신잠’과  문씨형제들의 연배차이 때문에 직접적 사승(師承)인연은 어려웠을 것 같다.

한편 어린 나이부터 ‘신잠’을 모셨던, 백씨3형제의 첫째 ‘기봉 백광홍(1522~1556)’은 1549년 사마양과, 1552년 문과급제자로 35세에 타계하였다. 둘째 ‘풍잠 백광안(1527~1567)’은 40세 타계했고, 셋째 ‘옥봉 백광훈(1537~1582)’은 1564년 진사로 해남(당시 영암) 이거 후에도 부친이 계신 고향을 오가며 장흥 관련시를 꽤 남겼으며, 45세에 타계하였다. 여기서 문씨형제와 백씨형제들 교류를 말해본다. 그 나이가 앞선 '기봉 백광홍'이 주도하였을까? 유치 보림사와 서계(西溪)에서 사흘 밤(三夜)을 문씨형제와 보냈으며, 그 三夜 모임에 ‘옥봉’도 합석했던 것 같다. ‘옥봉’은 훗날 ‘기봉’과의 보림사 독서를 회고한다. ‘기봉’은 돌아오는 길에,  ‘모씨(牟氏) 3형제’ 일화를 끌어와 <詩 贈別仲章(증별중장)>에서 ‘모산로(茅山路)’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했다.

한편 ‘옥봉’은 ‘문씨형제의 막내 숙장(叔章)’과 각별했다. 연배와 취향이 비슷했기 때문일까? 진사시 입격은 ‘옥봉’이 ‘叔章’보다  3년 빠르나, 서울에서 과거준비를 함께 했던 것 같다. 1567년에 소과 입격한 ‘숙장’은 낙향 은거하며, ‘백장’의 아들로 ‘옥봉’이 아낀  ‘순거 문희개’도 1576년에 진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기봉집, 옥봉집>에서 백광홍은 “贈문伯章2수/贈別仲章”을 남기고, 백광훈은 “贈문伯章2수/증별仲章”, “話문叔章/寄문叔章/寄문순거/문순거來訪”을 남겼다.

한편, 문씨형제의 ‘풍암(叔章) 문위세’는 외가 해남윤씨 집안의 소개로 그 자형 되는 진원박씨, ‘죽천 박광전(1526~1597)’과 함께 안동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이황’에게 직접 배웠으며, 그 학연으로 ‘남평문씨, 진원박씨’는 남인(南人) 당색을 잇게된다. 그 ‘풍암(숙장)’의 3남 문형개를 잇는 유치방 출신으로 훗날 “둘은 대과급제에, 둘은 소과입격으로 겹쳐진 3형제로, 2차 문씨3형제”라 할, ‘덕(德)자 3형제(덕룡,덕구,덕린)‘가 나온다. 장흥 유치로 옮겨가 계속 실아온 ‘풍암(숙장)’ 후손들이 장흥 남평문씨의 본류가 된 셈이다. 여기에서 유념할 사정이 있다. 현재의 부산면 ‘부춘정’과 그 앞에 있는 ‘용호(龍湖)’로 새겨진 각자(刻字)를 두고 그 혼선이 잦다. “龍湖 각자바위를 두고, ‘옥봉’이 ‘문희개 문익명 부자’를 위하여, 또는 ‘문익명 형제’를 ‘이룡(二龍)’으로 보고서 써 주었다”고 일각에서 주장하나, 그 연배차와 시절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청영정 문희개’는 왜란 종결 무렵에 은거하였는데, ‘옥봉’은 이미 임진난 10년전 1582년에 타계하였고, 오히려 '용호 문익명'이 스스로 각자(刻字) ‘용호’를 자호(自號)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장흥읍지> 일부내용은 오류이며, <남평문씨 족보>와 큰 차이가 있다. 한 말씀 부언하면, 일각에서는 ‘부춘정, 용호, 용연, 용강’만 마주치면 ‘장흥의 부춘정, 용호, 용연, 용강’으로 바로 단정하는데, 그런 ‘부춘정, 용호, 용연, 용강’이야 다른 곳에서 쉽게 보이는 이름들이니, 전후 사정을 따져보이야 한다. ‘장흥 청영정’도 마찬가지이다, ‘백호 임제(1549~1587)’는 “용호 청영정”이라 표제하여 ‘서울 용산강 용호 청영정’을 지칭하였다. 옥봉의 “청영정 사시사”도 ‘문희개의 호, 청영정’과 한자가 다르기(暎/穎)도 하며, 그 내용 역시 장흥 현지사정과 판이하다. 요컨대 “장흥 정자들은 기생의 풍악가무와 경향(京鄕)선비들의 음주풍류에 만남이별의 정을 나누던 곳은 아니다”고 할 것이니, ‘어떤 부춘정, 청영정인지’를 분별해야한다. 마침 백씨후손 ‘계서 백진항’은 옥봉선생이 남긴 원시(原詩)에 대응한 차운시를 <계서유고>에 남겼음에도, “용호잡영, 청영정사시사”등에는 차운을 배제하였다. 한편 ‘반곡 정경달(1542~1602)’의 <반곡집>에는 ‘옥봉 백광훈, 순거 문희개’와 교류시가 나오는데. 그 내용을 따로 새겨볼만 하다고 여긴다.

2차 문씨3형제로는 첫째 문덕룡(1666~ )이 가장 늦은 1717년 생원, 둘째 ‘장육재 문덕구(1667~1718)’가 1695년 진사에 1705년 문과급제자로서, 예조좌랑과 청안현감을 거친 뒤에 은퇴귀향하였는데, 그가 남긴 <장육재 유고>는 당대 장흥의 인문과 풍경을 풍부하게 전해주는 문화적 자산에 해당한다. 장흥문화원의 차기 국역(國譯)대상으로 선정되기를 간곡히 당부드린다. 세째 문덕린(1673~1739)은 소과를 비껴난 유학 출신으로 1708년 식년시 문과에 보령현감과 영암군수, 정3품 우통례 등을 거치고 충청도 부여로 은퇴하였다. 그 지역에 송덕비와 묘소가 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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