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삼창(三倉)으로 ‘재(在)장서 사창(社倉), 在안양 해창(海倉), 在고읍 남창(南倉)’이 있었다. 장흥 동쪽 4포구로, ‘사촌포/염소(鹽所)’, ‘해창/장흥부 조운창’, ‘수문포/전라감영 도청’, ‘율포/전라병영 도청’ 등이 있었다. 왜란 당시에 전라좌수영에 소속된 장흥지역 진관(鎭管/關防)으로 ‘회령포鎭’이 유일하였고, ‘안양 해창포’는 전라좌수영 수군편제와 무관하였다. 그런데 일각에서 정유난 당시의 ‘안양 海倉’ 역할을 논함에 있어 느닷없이 ‘장관청(將官廳)’의 군사적 성격을 끌어오는 모양인데,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將官廳’은 왜란이 끝난 후에 종전의 ‘제승방략’ 체제를 개선하는 차원에서 채택한, ‘속오군(束伍軍)’ 체제의 지휘관 집무처에 해당하며, 1654년경에야 최초 등장하였다. 18세기에 전국적 영읍(營邑)에 확산되었고, ‘안양 해창’ 뿐만 아니라, ‘장흥부 관아, 회령포진, 해남현, 강진 고금도’에도, ‘수영’에도 ‘將官廳’은 있었다.

요컨대 왜란 당시에 ‘안양 해창 장관청’은 아예 없었을 뿐더러, ‘해창 장관청’이란들 전라좌수영에 편제된 수군조직이 아니며, ‘해창 장관청’이 어떤 ‘병선, 징선(徵船)’을 관장했던 것도 아니다. ‘군관청, 훈련청, 교련청, 장청’과 병립하던 무관(武官) 장관(將官)의 근무처 겸 숙소에 해당할 뿐으로, ‘속오군’ 편제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설치되었지만, 결국에는 유명무실해졌다. <장흥부지도, 1872>에도 ‘장흥府 동헌 장관청’이 나온다. 혹자가 보도하는 <장흥읍지 무인지,1938>는 단지 ‘해창(海倉)’에 관하여, 海倉에 함께 있던, ‘장관청, 병선, 징선’을 병기하고 있을 뿐이니, 한참 훗날 기록 <무인지,1938>에 의지하여 ‘안양 해창 군영구미’의 군사적 특성으로만 속단할 일이 아니다. 우선 그 시점부터 다르지 아니한가? 왜란 무렵 ‘안양 海倉’에 ‘전라좌수영 將官廳’은 있을 수 없었고, 아울러 “봉세관(捧稅官) 기숙소(寄宿所)”라 했으니, 그 將官廳이 ‘군영구미 창고’를 직접 운영했던 것도 아니다.

혹자가 보도한 “세관기(旗)가 세워졌다함”은 낭설일 뿐이다. 요컨대 임진난 무렵 ‘안양 海倉’의 본질은 ‘장흥부 조운창(漕運倉)’으로서 ‘세미(稅米) 운송처’ 역할에 있었다. 조선수군 재건로에 ‘군영구미’로 등장한 ‘안양 海倉’ 성격은 李충무공 당신의 <난중일기> 자체에서 간취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복귀를 앞두고서 이순신 일행이 군량미 체크를 할 겸 그곳에 당도하니 “장흥 감관(監官) 색리(色吏)가 그곳 창고에서 쌀을 훔치고 있었다.”는 것. 즉 ‘전라좌수영 수군’이 아닌, ‘장흥부(府) 색리(色吏)’가, 또한 ‘전라좌수영 창고’가 아닌, ‘장흥府 창고’에서 쌀을 훔치고 있더라는 것. 돌이켜 필자의 지난번 회령포 축제강의에 참석한 어떤 ‘보성 군학리 군영구미’ 주장자에게 “접안 포구도 못되는 보성 군학리에는 조운창(漕運倉)이 없는 반면에, 안양 海倉은 ‘장흥부 색리’가 쌀을 훔치고 있던, ‘장흥부 漕運倉’이 있던 곳이다./ 장흥府 사람들이 가까운 ‘안양 海倉’을 제쳐두고 훨씬 멀리 현재의 ‘보성 군학리’까지 세곡미를 운반했겠느냐”고 했더니, 그 참석자 왈(曰), “안양 海倉에 ‘조운창’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조선시대의 전라도 조운(漕運)에 관한 기본인식이 상이했기 때문이다. 약술하면, ‘고려시대 13창’ 조운제도는 왜구 침입으로 고려 후기에 붕괴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에는 전라도 북쪽 9창은 복원된 반면에, ‘전라도 3창, 성당창(또는 군산창), 법성창, 영산창’은 제한적 또는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다.

장흥부 세곡(稅穀)은 정책적 필요에 따라 ‘영산창 또는 법성창’으로만 육운 또는 조운을 하였는데, 어느 후기시점에 이르러 ‘세곡, 대동미’ 경우도 ‘서울 경창(京倉)’까지 운반책임이 있었으며, <정묘지>에 의하면 대략 15일 여정이었다. 장흥府 ‘안양 海倉’처럼 세곡(稅穀)을 조운하는 ‘海倉 조운창’ 사례는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에 여러 곳 있다. 반면에 장흥府에서 소요되는 ‘환곡(還穀)’ 물량은 ‘장서(옛 장택현) 사창’에 모아졌다. ‘京江 조운’이 시작된 초기에는 ‘관선, 병선’ 등을 이용하다가 ‘세습신분 조운인력의 한계, 운반선의 원천적 부족, 임운(賃運)의 효율성’으로 인하여 조운제도가 1704년경에 일부 개혁되면서 ‘사선(私船,商船), 경강선’ 등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에는 ‘세곡선’을 일부러 난파시키는 고패(故敗)치패(致敗) 사건이 빈발하여 ‘징계, 파직, 유배’를 당한 장흥부사들이 꽤 있었다. 1880년경 장흥부사 이학래(1824~1883)는 1882년경 치패사건으로 암행어사 봉고파직이 되고 그때 맞은 장독으로 목숨을 잃었으니, 조선후기 장흥부사가 겪던 스트레스 하나는 ‘세곡선’ 업무였다. 이에 ‘안양 海倉(아마 영신당)’에서 ‘경강선, 세곡선’의 무사항해를 비는 ‘기풍(祈風)제’가 있었으며, 그곳을 오고간 몇 장흥부사 철비(鐵碑)도 세워져있다. 또한 장흥부 漕運사례와 제도적 모순을 실제 목격했을 법한 장흥선비들, ‘이민기, 위세옥, 위백규’ 등의 ‘조운 시폐론’도 남아있다. 이에 <정묘지, 안양방,1747>으로 다시 되돌아가 보자. 비록 18세기 기록이지만, 조선시대의 전라도 조운체제의 역사적 내력과 합쳐보면, ‘안양 海倉 조운창’의 제도적 성격을 나름 이해할 수 있다. 이 부분 기록을 비껴두고 <1938년 무인지>에 언급된 ‘장관청’으로 설명함은 꽤나 무모한 시도일 것.

<정묘지(1747)/ 안양방, 창고>
①“在방남해구(坊南海口) 저(儲)본읍세미(本邑歲米) 해운경창(海運京倉) 조선례(漕船例)用포촌지(浦村誌) 島商船(도상선) 或(혹)京江船(경강선)/ 附船所(부선소) 在창전(倉前) 有선창(船艙), 매(每)세역(歲役)민정(民丁)굴토(掘土) / 대선1, 병선1, 사후선1 俱屬(구속)좌수영/ 전선(戰船)저치미(儲置米) 3,201석” ( <주>,여기에 ‘병선, 전선저치미’를 언급한 부분은 ‘장흥부 조운에 兵船 등을 이용했던 시기’에 해당할 것)
②“해창(海倉)- 在안양 / 장재도 - 在해창(海倉)下, 세선(稅船) 소박처(所泊處)”라 했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