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석자 알만한  장흥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뒷 끝이 훈훈하다

▲장광효/카루소 대표

고이청준작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척박한 시대를 살았던 우리 자응(長興) 사람들은 연필이나 붓 한 자루를 들고 끄적거리다가 소절쟁이가 되고 환쟁이가 되어 문화의 반열에 회자되고 있으니 그 또한 자응인들의 재주 아닐까요”
문예인들은 그렇다고 치자. 경제, 사회, 법조, 행정 학계 정치 등 제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향인들에게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수식어로 자랑 하기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자응은 갸날프고 힘겨운 물줄기가“개천”처럼 흐르는 삭막한 고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응의 경관과 서정과 역사의 배경은 실로 아름답고 풍요로워서 그 향맥을 이은 이들의 성공담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회고풍으로 시작 하자면 그 옛날의 장흥 사람들이 혹은 하동河童이 되어 냇가를 휘젓고 놀았던 때가 있었고 지게를 지고 푸나무 짐을 짊어지거나 소를 먹이던 초동草童이었던 유년의 시절들이 아득히 그리울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고단하고 힘겨웠던 하동이나 초동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처처에서 이름 석자를 거명하면 아하 하고 담론의 대상이 되는 인사人士들로 일가를 이루고 그 분들의 이야기는 오늘의 장흥을 객관적인 자긍심으로 위로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장흥출신의 인사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조 행정 등 제분야에서  시선을 끄는 할동들을 하고 있다.
특히 문화 분야에서는 문학, 미술, 음악, 디자인의 장르에서 선명하고 그윽한 족적을 남기고 있어서 끊임없는 화제가 되고 있다. 장흥 출신 문화 예술인들의 주목 받을만한 활동과 성과는 오늘의 장흥을 예지적인 고장으로 표현 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장광효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경이적이었다.
근간에 재경 후배인 경기대 안황권 교수에게서 장광효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 시대 패션의 아이콘, 남성 패션의 대부, 차세대 패션 산업의 아이디어 뱅크..그러한 수식어는 필자에게는 한없이 낯설었다.  사시사철 부족함이 없을만한 옷을 가지고 있고 더위를 가리고 추위를 막아줄만한 의복에 부족함이 없는 필자로써는 “패션”의 개념 그 자체가 체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옷장의 의복들이 소위 패션의 영역으로 분류할만한 옷들이 아닐지라도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입을 것에 궁색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여 장광효의 이름도 그저 여담처럼 흘러 갈 뻔 했다. 그이의 이름에서 한 시대의 특별한 색깔과 향기와 여운의 파문이 동반 한다는 사실을 필자로써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럿이 모인 점심 자리의 행간에서 필자의 말 끝에 그의 이름이 묻어 나왔다.

▲관산초 5~6학년쯤, 천관사 소풍길의 사진, 가운데 선그라스 낀 소년 장광효. 그 시절 선그라스를 끼고 폼을 잡은 소년의 끼가 느껴진다.

“장광효라고...? 유명한 디자이너 라든디..유년시절을 관산에서 성장 하였다든디.. 혹시 그 이름 들어 봤쓰가?
필자의 말 대답은 동석해 있던 젊은 남녀 두명에게서  즉각적이고 열광적으로 반응 되었다.
“워매 장광효씨 그양반이  관산 사람이어요. 그 카루소 유명 한디요”, “그 양반 스타여요. 아이고 아무리 패션을 모른다고  ..장광효   그분을 모르까이..”
그들은 당장에 스마트폰을 검색하여 장광효 그 인물의 매력적인 기사들을 읽게 해 주었다.
장흥 출신의 혹은 소설가, 혹은 화가, 혹은 가수 혹은 장관쯤을 역임한 자랑스러운사람들의 근황을 마치 친구들의 이야기처럼 질퍽하게 나눌 수 있는 자유가 우리들의몫이라고 치자. 그런데 장광효의 기사는 웬지 경이롭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이 “패션” 그 영역에 대한 너무나 무지한 소양 때문인 것 같고, 나아가서는 천관산 기슭의 옥당 마을에서 유년의 시절을 지낸 “하동”이나 “초동”이었을 한 인물이 그 생소한 영역에서 빛나는 질량質量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소설 같아서였다.

●장광효의 세상은 정남진의 바다와 천관의 서정에서 형성되지 않았을까
캠브리지, 논노 의류 상품인 이런 이름은 우리가 아무리 촌스러워도 귀에 익숙하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라는 도시가 향수나 패션을 선도 하는 도시라는 것 쯤은 아는 척을 해도 어색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한 정도는 귀가 뚫리고 눈이 열려 있어서 옷, 의복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은 있게 마련이다. 하여 우리들의 아부지나 엄니께서 오일 시장에 가서 고르고 골라서 옷을 사고 그 옷을 입으시고 마실을 가시면 이웃들이 한 마디쯤은 하게 마련이다.
“와따 쪼옥 빼 입었네 그려. 카라(컬러)가 쌈박 한디... 가라(무늬)도 튀고 가다(폼새)가 잽히네.
돈 잔 썻것는디... “그 시대 이웃 어른들의 패션 평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민망하게도 대부분 일본식의 외래어였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서툴지 않았다.
 자응에 눌러 사는 우리들에게 살짝 충격을 안겨준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는 1956년 강진 성전에서 태어 났지만 외가인 관산읍 옥당리(옥동마을)에서 성장 하였다.  관산초 44회, 관산중 20회 졸업생이니 감성과 자의식이 구체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인 유소년의 시절 장광효는 아마도 천관산의 기슭에서 초동이었을 것이고 관산읍내를 가로지르는 죽교천의 물길에서 하동으로 건강하고 영롱한 꿈을 키우며 자라지 않았을까.
“제가 어릴 적에 조금은 특이한 기질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의 시절에 혼자서 천관산의 정상까지를 자주 올라 갔어요. 아시다시피 천관산은 해발 724m의 높이어서 10대 소년이 오르기에는 버거운 산 길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천관산의 정상에 오르면 내려다 보이는 세상과 넓디넓게 트인 하늘 저편의 모든 것 들이 신기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구름의 그 오묘한 색깔과 모양, 초록의 잎새에 투영 되는 햇살들이 빚어 내는 찰나적인 색상, 하늘빛을 배경으로 그 형용이 다르게 다가오는 기암괴석들의 부드러운 조형 그리고 나아가서는  아랫마을 방촌리에서 학문과 문화를 담론하던 옛 선비들의 이야기까지 전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장광효의 예지적 재능은 한반도의 남녁 마을 정남진의 자연속에서 영글어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남진 바닷녁이 끝없이 짓쳐가는 물결, 천관산의 경관과 서정이 그이의 심신에 올올히  새겨 지고 드디어는 오늘의 세상에서 패션의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을까. 필자 또한 자응 사람이기에 장광효의 패션 세상을 이런 소설체의 상상력으로 진단해 보는 것이다.

●국내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 그 수식어가 돋보인다.
장광효는 정남진의 바다 혹은 천관의 기상에서 영글어진 인문학적 재능을 가슴에 안고 출향의 장도에 오른다. 하여 국민대학 조형대학에서  장식미술을 전공하여 꿈을 이루는 첫 계단을 밟는다. 그의 꿈은 멈추지 않고 프랑스 유학의 길을 연다. “퐁텐 불루 예술학교”를 졸업한 그이의 재능은 상상력과 손 끝이 합일되어 선線을 그리고 색깔을 입히고 침예針藝가 더해져서 격조 있는 작품(옷)으로 탄생한다. 하여 국내의 정상급 브랜드인“논노” ,“캠브리지”의 수석 디자이너의 입지를 굳히고 나아가서는 국내 최초의 남성복 디자이너라는 쉽지 않은 수식어로 회자되는 것이다. 패션에 참으로 문외한인 필자의 상식선에서는 패션은 그저 유명 배우, 가수 모델들의 옷이며 그것도 여성 중심의 튀어난 옷이라는 개념이 전부이다.
그래서 남성 패션을 주도한 장광효의 개척적인 입지가 무게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여성의 패션.. 그 행간은 아름다움의 추구 , 혹은 매력의 창출이라면  남성의 패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문득 필자와 동시대의 시간과 공간속에 더불어 살고 있는 수많은 남정네들이 스스로를 꾸미고 출타하고 교류 하는 과정에서 입는 옷들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한다. 그 전문성 없는 상상력 속에서 번뜩이듯이 그려 지고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어야 오늘 옷차림이 격이 있네. 자네가 달라 보이네” 어느 날 모임에서 옆 자리의 지인이 건네는 말 한마디는 사람을 진중하게 만든다. 언행이 점쟎아 지고 인품이 돋보이기도 한다 옷 차림은 그런 마력이 있다.  하여 남성에서 옷 차림은 어쩌면 인격일 수 있고 지성이고 교양으로 승화 되기고 할 것이다.
장광효는 패션이라면 “여성”의 전유물 같은 고정관념 같은 틀에서 남성의 옷 차림에 인문학적 감성을 덧 입혀 격格과 지성과 교양의 면모를 창조해 낸 것이라는 필자의 진단이 그저 틀린것만은 아닐 것 같다.

●장광효의 생각
-세상에 감성을 입히고.독서. 여행, 영화, 사진으로 옷을 디자인 한다.

“글로벌 글쎄요. 패션을 꼭 전공한다고 해서 옷을 잘 만든 거는 아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후배들한테 어떻게 얘기하냐 하면 옷도 중요하지만 옷 말고 다른 문화. K 팝이라든가 아니면 책이라든가 아니면 여행이라든가 사진이라든가 영화 같은 걸 많이 보고 전 세계 사람들과 별 무리 없이 공유를 한다면 우리가 만든 우리의 정서, 우리의 감성. 그게 녹아들어도 외국에서 쉽게 이해를 하고 받아들일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 BTS가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잖아요. 그것도 좋아하고 우리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듯이 옷도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그 전 단계까지 왔기 때문에 우리가 지혜를 모아서 어떻게 잘하면 아마 먼 미래가 아니고 가까운 미래에 아마 세계 시장에 한국의 K 패션도 KPOP처럼 두각을 내지 않을까 하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장광효가 TV 대담프로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우리는 장광효의 말 마디에서 그이가 단순한 패션의 생각이 아닌 인문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작업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문림의향으로 지칭되는 자응의 문맥이 어느듯 장광효와 같은 패션의 선구자로 이어 지는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공유 하는 훈훈하고 자긍심 있는 세밑의 화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패션업계는 그 경쟁이 가장 치열하고 시간과 공간의 유행에 민감하여 아무리 능력있는 디자이너라 할지라도 개성과 명성울 유지하는 것을 장담 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한 업계에서 장광효는 남성 패션의 일인자라고 지칭해도 손색이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지키고 있다.
그이는 가히 한국 남성 패션의 개척자이고 혁명아였으며 지금도 그 명성은 변함이 없다. 이렇듯 쉽지 않은 영역을 창조한 장광효의 성공 비결에 자응과 천관산의 역사성과 서정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더불어 예술의 여러 장르인 영화와 사진은 물론  탐구의 독서와 여행이 장광효의 선을 그리는 작업을 풍성하게 덧칠해 주고 있으리라.
하여 1987년 설립한 그이의 브랜드“카루소”가 장광효의 이름 석자와 함께 지구촌의 패션을 주도 하는 그림을 그려 본다.  그리고 소설가의 입장에서 그이의 패션에 배우자인 길애령의 노래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까가 매우 궁금해 진다.

▼장흥 천관산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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