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중 형!
하필이면 생성의 봄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셔주던 그날 밤, 지나칠 수 없는 푸릇한 글 한줄 남김없이 생의 마지막으로 듣는 봄비의 여음만을 머금고 싸늘한 대학병원 병상에서 쓸쓸히 운명하셨다니 믿기지 않고 너무 황망하고 서럽습니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출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 어길 수 없는 속세의 철칙이라지만 석중 형의 타계는 장흥인의 가슴에 또 다른 의미의 아픔으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의 궤적이 말 해주듯 당신은 장흥문학의 역사요 증인으로서 명확한 기록이 있기에 가능하며 지금 우리는 그런 삶의 가치를 우러르며 숙연함 속에서 당신을 잃은 상실과 고통으로 섧게 오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께선 일찍이 장흥중?고 시절부터 향토색 짙은 문학을 탐닉하시더니 어른이 되어서도 고향을 보듬고 지난 30여 년 동안 장흥의 문예지 “별곡문학”의 집필을 주간 하셨으며 특히 회장으로서 역량은 수많은 국내 원로 문인들과의 폭 넓은 친교를 통해 장흥문학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장흥이 전국 최초 “한국문학 관광특구”로 지정되는데 산파역을 하였습니다. 그밖에도 전국 문학인 대회 유치, 문학현장 탐방, 학술 대회등 해마다 혁신적인 문학행사를 기획 주관하여 후배 문인을 양성하고 문림장흥의 위상을 높이는데 진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주위의 권유에 마지못해 언론의 영역까지 참여하시어 장흥신문의 진정한 주필로서 정론직필의 언론관을 철학으로 지역 민심을 다독이며 사회의 목탁이 되어 독자의 기대와 욕구를 씻어주는 청신한 빗물이 돼 주셨습니다.

석중 형!
당신께선 평소 겸묵과 사색의 온화하신 성품에다 누구보다도 역사 앞에 정직했고 인간에게 다정했고 자연과도 친화하며 관직과 재부(財富)를 탐내지 않았던 사전적 가난한 선비로서 교양과 믿음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또 한편 생각하면, 형께서 한때 짧은 기간 건너온 정치의 빨래터에서 옮은 얼룩과 또 절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복음생활이 방향이 다른 지성들과의 오해 속에서 자신 본연의 진실이 가려지는 아픔도 겪었었다지만, 이제 그조차도 무망한 이승에서의 소꿉놀이가 아니었던가요. 내가 문단 후배로서 형의 문학세계를 어깨 너머로 훔쳐보고 흉내 내던 기억들이 아련한데 언젠가는 특정사안에 복선을 깐 나의 싯귀 한 대목을 호되게 지적해 주시면서 내 얼굴을 후끈 거리게 하셨죠. 그리고 자칫 딱딱하거나 건조해지기 쉬운 논설이나 평문을 문학적 미감으로 다듬어 빛나게 해 주시던 그 특유의 글 솜씨를 다신 볼 수 없다는 절망감에 힘이 빠지고 가슴까지 서늘해집니다.

석중 형!
이 봄날 당신이 없는 세상은 잿빛으로 무겁게 가라 않은 느낌입니다. 안개이듯 바람이 듯 어찌 이리 허무하게 떠나시고 맙니까?
하지만 인생은 무상산(無常山)을 허물며 살아간다고 했거니와 73년간 고난의 산을 허물며 살아 왔기 때문에 아쉬움을 비우소서. 형께서 못 다 이루신 일들 후배들이 꼭 해내겠으니 부디 하늘나라에서도 고향 장흥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앞길을 밝혀주소서.

석중 형!
당신의 관을 들어줄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계시는지요. 당신을 흠모하는 저 많은 사람의 슬픈 전송을 들으며 먼 길 편히 가십시오.
엎드려 통곡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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