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원(원장 고영천)에서는 조선후기 영조때의 학자 김희조의 『방호선생문집(放湖先生文集)』을 문림의향 장흥 고전국역총서 제5집으로 발간했다. (학민문화사, 424쪽)
『방호집』은 김희조(1680~1752)의 시문과 사상을 모아 수록한 시문집이다. 특히 『방호집』에는 김희조의 사회 비판적인 현실인식의 면모를 영조에게 사회개선책으로 제안한 만언소가 있어 당시 사회사정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장흥을 중심으로 강진과 화순 등 전라도 서남지역의 산천과 당시 사정을 주된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방호집』은 2권 2책으로 1829년 후손인 김채규, 김종진 등이 주도하여 1832년쯤에 간행되었다. 김덕현, 정재면, 김상학의 서문과 김익수의 발문이 있다. 1권에는 오언절구(28편), 오언율시(23편), 칠언절구(71편), 칠언율시(136편), 육언절구(3편), 오언장편(1편), 고사(5편)가 있다. 2권에는 소(1편), 서(8편), 제문(2편), 그리고 끝에 영조 무신란 때의 성균관 수관사적이 첨부되어 있다.

방호 김희조(放湖 金喜祖, 1680~1752)선생은 본관은 영광, 자는 경선(慶先)이다. 부~1709)의 아들이다.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고 특히 시를 잘했다. 1713년(숙종 39)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1728년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모든 유생들이 다투어 도피하여 공관의 지경에 이르자 뜻을 같이 하는 5명의 유생(정봉징, 조홍업, 조덕희, 유용, 박순우)과 직임을 나누어 성묘(聖廟)를 수호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들 여섯 선비는 충신이라 찬사를 받았다.
1728년 무신란 이후 사회모순을 타개하려고 영조가 구언교를 내리자 김희조는 응지상소를 올린다. 이 상소에서 당시의 난국을 타개하는 요체를 인심을 모으고(結人心), 인재를 거두며(收人才), 군정을 잘 다스리는 것(修軍政)으로 요약하고, 이를 설명하는 가운데 수 10조에 이르는 폐단을 지적하고 구제책을 제안하고 있다.
김희조는 시작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현실 사회의 비판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칠언율시 가운데 9개의 조목별로 사회 폐단을 읊은 시였다.
당시의 폐단들은 조적, 학교(學校), 붕당(朋黨), 이서(吏胥), 관도(官屠), 군정(軍政), 남초(南草), 염간(廉問), 추노(推奴)였다. 구폐시(求弊詩) 또는 구폐시(九弊詩)라고도 한다. 이 9폐(九弊)의 지적은 상소문과 짝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김희조의 현실인식과 사회모순에 대한 재야시인으로서의 술회로,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기강문란과 사회경제적 곤핍을 잘 대변하는 재야비판지식인의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김희조는 만년에 향리인 장흥으로 돌아와 장흥과 강진, 능주, 화순 등 산수 사이에서 시를 읊으며 스스로 호를 ‘방호(放湖)’라 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강학과 교류를 하였다. 1734년에는 동약계의 서문을 짓고 보림사 대적광전이나 탑산사 중수 서문을 쓰는 등 향촌 활동도 이어간다. 천관산 기우제문을 수령을 대신하여 짓기도 한다.
『국역 방호선생문집』은 국역은 장흥 장평 출신 한학자로 록양고문연구원원장인 박경래선생이 하였다. 록양 박경래 선생은 장흥문화원 번역총서 제1집인 백진항의 『계서유고』를 번역했다. 그리고 존재 위백규의 동생인 위백순의 『서계유고』, 고봉선생 종가고문헌집(高峯先生 宗家古文獻集, 3책) 등을 번역했다. 문집의 해제는 이해준교수(공주대학교 명예교수)가 하였다.
한편, 장흥군과 장흥문화원의 ‘문림의향 장흥 고전국역총서’ 간행 사업은 2017년 1차 년도에 『계서유고(溪西遺稿)』(백진항) 번역을 시작으로 2차 2018년에 『만수재유고(晩守齋遺稿)』(이민기), 3차 2019년에 『청강유집(淸江遺集)』(이승), 『제암집(霽岩集)』(정명열), 4차 2020년에 『간암선생문집(艮庵先生文集)』(위세옥), 『방호선생문집(放湖先生文集)』(김희조) 등 모두 6집을 번역ㆍ출간했다.

특히 이민기(1646~1704)-김희조(1680~1752)-위세옥(1689-1736)은 사회개선책을 제안하는 실학 저술을 많이 남겼다.
이민기는 경세에 밝아 순상(巡相)에게 지방사정을 구체적으로 연역(煙役), 군병(軍兵), 궁둔(宮屯), 금송(松禁)과 무판(貿販), 조선(漕船), 방언(防堰), 도청(都廳) 등 8가지의 남도 민생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할 방안을 제시한다.
김희조는 만언소에서 사회개선책을 제안하며 구폐시를 지어 사회폐단을 고발한다.
웨세옥은 1734년의 응지상소에서 폐단을 구제하는 구폐(救弊) 6조를 올린다. 수학정(修學政), 입방약(立坊約), 설리창(設里倉), 급전재(給田災), 개노군(改櫓軍), 수인재(收人才)이다. 그리고 힘서 실천할 무실(務實) 7사(事)로 실경천(實敬天), 실전학(實典學), 실근정(實謹政), 실납간(實納諫), 실파당(實破黨), 실숭검(實崇儉), 실애민(實愛民)에 대한 글을 남긴다.
이러한 인적 유대와 성향으로 이어진 경세론과 향촌사회의 개선론은 뒤이어 같은 장흥출신의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의 『만언봉사』나 『정현신보』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진에 유배되어 실학의 3대서를 찬술한 다산 정약용(1762∼1836)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방호선생문집』 등 장흥 고전국역총서는 이같은 연구에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영천 장흥문화원 원장은 “문림의향 장흥 고전국역총서 간행을 앞으로도 꾸준하게 추진하여 문림의 전통을 계승하고 인문학적 기반을 닦아 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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