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주무셨습니까? 새아침입니다. 동창을 밝히는 새들의 지저귐이 시작됩니다. 무탈함을 고마워하는 시간이지만 부끄럽기도 합니다. 111년 전 그날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32살에 강제로 숨이 끊긴 날입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였습니다. 2월 14일에 내린 사형 선고가 바로 집행됐습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손수 지어서 보내주신 하얀 두루마기는 수의가 되었습니다.

‘탕탕탕’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죄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러시아 율리우스력 10월 13일) 아침 7시, 30초 만의 거사였습니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코레아 후라’를 외치며 잡혀갔습니다. 이후 랴오닝(遼寧)성 뤼순(旅順)감옥에 갇혔으면서도 ‘동양평화론’을 쓰고 많은 글씨를 남기며 성자의 삶을 다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67×34.5㎝ 화선지 위에 敬天(경천)을 쓰고 ‘경술 삼월 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와 함께 손바닥 도장을 찍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라기보다는 두려워할 줄 알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로 가게 된 ‘토마스 안중근’은 병자성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렇지만 뮈텔 천주교조선대목구장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은 죄를 물어 거부했습니다. 사실상 파문이었습니다. 1993년 8월에야 김수환 추기경이 의미가 더 큰 평화를 위한 노력이라 했고, 2010년 3월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추모미사를 집전하며 복권됐습니다. 이젠 1431년 19살로 영국군에 화형을 당한 프랑스의 백년전쟁 영웅 ‘잔 다르크’가 성녀(요안나 아르켄시스)임을 들어, 안 의사의 시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3월 그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대한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죽은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의 소망을 지금껏 풀지 못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 단재 신채호 선생도 그곳에서 1936년 2월 21일 생을 다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내부의 적과 빈약한 힘이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치욕이 되었습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 광석동 ‘순흥 안씨’ 자자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슴에 찍힌 일곱 개 점이 북두칠성을 닮았다며 응칠(應七)로 불렸습니다. 어릴 적부터 말 타기, 활쏘기와 명사수로 이름난 무인이었습니다.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하며 교육, 계몽, 포교, 군사훈련 등을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1907년 7월 19일 광무황제(고종)가 강제퇴위 당하며 망국에 이르자, 울분을 느끼며 망명을 선택했습니다.

그해 가을, 녹둔도를 사이에 둔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최페치카(재형, 표트르 세묘노비치)의 유격부대 소대장으로, 1909년 1월에는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으로 의지를 다지며 권총사격 연습도 계속했습니다. 그 정신과 노력이 3발은 이토, 또 3발은 수행원을 응징한 결과가 됐습니다. ‘임적선진 위장의무(臨敵先進 爲將義務), 적을 만나 앞장서는 것은 장수의 의무다’를 보여주었습니다.

지난달 마지막 주일 아침의 메시지 편지입니다. 전날 저녁을 이렇게나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조부님이 응자 학렬입니다.’ 황해도가 원적인 ‘순흥인’ 청년의 한 마디가 깨우침이 되었습니다. 경쟁이 더해진 훈훈한 낮 시간도 좋았습니다. 상서로운 기운이 철저하게 했고 병꽃이 전하는 희망을 보게 했습니다. 다들 버들나무를 닮은 숙로(宿老)가 되어가자고 했습니다.
다시 비바람입니다. 벚꽃이 끝나갑니다. 가지의 붉은 동백도 하나 둘 떨어지며 많지 않은 붕화(朋化)가 됩니다. 땅 위에서도 뜻을 같이 하며 곧게 피어납니다. 우리가 할 일도 계속됩니다. 또 새 아침, 벌써 4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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