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余和順人也 系出開城府千氏 先嚴諱萬重 先慈密陽朴氏 以肅廟庚子四月三十日 生余于邑內跡泉里 邑誌云麗朝眞覺國師之母 冬月得瓜於此泉食之孕國師 故名跡泉 五歲學千文先君於焃蹄書 所讀字問之 一一皆知 七歲學史紀初卷 是年四月 先君捐館輟學 九歲再入學 十歲學通鑑 自知音釋 但學文義 先生即京居 吳公始岳 以名士大夫 謫于此邑 母氏送糧其宅 使余食宿而學焉 恐在家誤讀也 母氏徃徃撰酒肴 進先生 傳辭曰 嚴以敎之 勤而讀之 使此無父之兒 幸得成人也 先生每對人 稱余之有是母也 十一歲庚戌之臘月 除夜亦誦百行而終十五卷 先生稱之曰 雖兩班之子 十一歲讀盡通鑑者罕有 除夜讀書者 亦未之有也 十二歲學孟子 先生易簀 嗚呼 余雖聞宣尼之卒也 七十子之徒皆心喪 而余以童子故未能也 十三歲年事大無 又無先生不學 五月慈侍捐世 嗚呼痛哉 從此永爲廢學 不足恨而吾兄弟以母爲天 只未展一日孝養忽見終天永訣 痛切心腑 余年十三兄年十七 不能看審家事 叔父在隣時時看護 有一奴一婢主家事 未幾婢逃去 如失左右手 徃投異胎兄家依之入貢生之役 侍奉官家 余雖廢學 而以勤讀故 藻思猶存 主倅愛之 置之册房 與衙子弟同遊 讀庸學 十五歲甲寅 官家捉虎 令册房賦捉虎行題余亦賦大古風一篇 頗有古詩體格 倅喜以上下衣資賞之 爲余衣薄也 將欲率歸 臨歸有障未果 亦爲僧之數也 若從彼而去 爲僧不可定也 十八歲恩老以法泉之人 來住雲興寺 一日訪余來言曰 聞汝有才而困窮 特來相訪 從我出家 勝於在家 余讀儒書斥佛之言 故對曰 爲僧不也 目當作一玩之行 恩老唯唯而歸 過數月 主倅遞歸余乃訪恩老之展 留一日 忽發仍存之意 乃時緣到也 恩老恐新官來索 送余于法泉師兄處 十九歲祝髮 受戒于安貧老師 時恩老在普興寺靈虛師主處 六月徃從之 學禪要 至冬畢四集 己未春聞碧霞大老 在大芚寺 學人多會 余欲徃叅 恩老從之同行 學楞嚴 夏滿向寶林寺龍岩師主處 學起信金剛等 削記刊記 多訛脫處 自古沿襲 而莫能辨定 余以初學 能卞之 龍老奇之 欲久住而恩老不從 訪就栖寺 靈谷師主 學圓覺 時余年二十一也

❍연담대사 자보 행업
-연담 유일대사(1720~1799)

 나는 전라도 화순고을 사람으로 계통이 개성부 천씨에서 나왔으니 아버지 휘는 만중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숙종 경자년(숙종46년1720) 4월 30일 전라도 화순읍내 적천리에서 태어났다.
화순읍지에 ‶고려시대 진각국사의 어머니가 겨울에 이 샘에서 오이를 얻어먹고 국사를 잉태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적천(跡泉)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배웠는데 아버지께서 종이에 써 놓고서 읽은 글자를 하나하나 물으셨는데 모두 대답했다.
일곱 살 때 사기 첫 권을 배웠는데 이 해 사월 아버지께서 세상을 버리시어 배우는 일을 그만 두었다.
아홉 살 때 다시 학문에 입문하여 열 살 때 통감을 배워 스스로 음과 해석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글의 뜻만 배웠다.
선생은 바로 서울에 사는 오공 시악이라는 분이었는데 명문가 사대부로 이 고을에 귀양 왔었다.
어머니는 그 댁에 식량을 보내고 나로 하여금 먹고 자면서 배우게 하였으니 아마도 집에서 공부하면 글을 잘못 읽을까 염려해서 그런 것 같다.
어머니는 가끔 술과 안주를 마련해서 선생께 올리면서 하시는 말씀은 ‶엄하게 가르치고 부지런히 읽게 해서 아비 없는 이 아이를 사람 되게 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선생은 매양 사람들을 만나면 나에게 이런 어머니가 계신 것을 치하하셨다.
열한 살 경술년(영조6년1730) 섣달(12월) 제야(그믐날)에 일백 줄을 외어 열다섯 권을 마치자(通鑑節要 東漢紀 世祖光武皇帝⟨上⟩以前) 선생이 칭찬하며 말씀하시기를 ‶양반의 자제일지라도 열한 살에 통감 열다섯 권을 다 읽은 사람은 드물다.″라고 하셨다.
열두 살 때 맹자를 배웠는데 그때 선생이 서거하셨다. 오호라, 나는 공자가 졸했을 때 칠십 인의 제자 무리가 모두 심상(心喪)을 입었다고 들었지만 나는 어린아이여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열세 살 때는 농사 작황이 매우 안 좋았고(큰 흉년이 들어) 게다가 선생도 없어 배우지를 못했다.
오월 달에는 어머니만 모시고 있는 처지에 어머니마저 타계하셨으니 오호라, 슬픕니다.
이때부터 아주 학문을 그만두게 된 것은 한스러운 일이 못되지만 우리 형제가 어머니를 하늘로 삼았는데 하루라도 효도와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갑자기 결별하게 되어 가슴이 매우 아팠다.
나의 나이는 열세 살이고 형의 나이는 열일곱 살로 가사를 세심하게 살필 수 없게 되자 이웃에 사는 숙부께서 때때로 보살피고 돌봐 주셨다.
남녀 노비가 있어서 집안일을 주관했으나 얼마 못가서 여종이 도망가 버리자 좌우의 손을 잃은 것만 같았다.
이복형 집에 들어가서 의지하고 살았는데 과거공부를 하면서 관가 시봉 일을 했다.
내 비록 공부는 그만두었으나 부지런히 글을 읽어 글 잘 읽는 재주는 오히려 남아 있었다.
고을 수령이 아끼면서 나를 책방(册房, 고을 수령의 비서秘書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으로 관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사로이 임용함)으로 두었다.
관아의 자제와 함께 놀면서 중용과 대학을 읽었다.
열다섯 살 때(갑인년1734) 관가에서 호랑이를 포획했는데 책방에게 ‶착호행(捉虎行)″ 제목으로 글을 짓게 하였다.
나도 대고풍(大古風) 한 편으로 글을 짓자 그런대로 고시체(古詩體)의 풍격이 있었다.
수령이 기뻐하면서 우 아랫도리 옷감을 상으로 주었으니 내 옷이 얇기 때문이었다.
수령을 따라서 돌아가려했는데 돌아갈 무렵 장애가 있어 실천하지도 못하고 승려가 되는 운수가 있었다.
만약 저 관청을 따라 떠났더라면 승려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은로(恩老)는 법천사 납승이었는데 운흥사에 주지로 와 있었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네가 재주는 있는데 곤궁하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방문했다. 나를 따라 출가를 하면 속가(俗家)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유가 서적을 읽어 불전은 배척한다고 대답하고는 ‶승려가 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응당 한번은 놀러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은로는 ‶알았다. 알았다.″ 하고는 돌아갔다.
몇 달이 지나자 고을 수령이 벼슬이 갈리어 돌아가고 나는 바로 은로의 처소를 찾아가 하루를 머물면서 홀연 그대로 남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겨우 시절 인연이 도래한 것이 아니겠는가.
은로는 새로 부임한 수령이 찾으러 올까 두려워서 나를 법천사의 사형(師兄) 거처로 보내버렸다.
열아홉 살 때 머리털을 바싹 깎고 안빈노사에게 계를 받았다.
당시 은로는 보흥사 영허사주(師主,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 처소에 계셨는데 유월 달에 그를 따라가 ⟦선요(禪要)⟧를 배우고 겨울이 닥치자 ⟦사집(四集)⟧을 다 마쳤다.
기미년(영조15년1739) 봄에 벽하대로가 대둔사에 계셨는데 학인들이 많이 모여든다는 소문을 듣고 나도 찾아가서 뵈었다.
은로도 따라나서 동행하여 ⟦능엄경⟧을 배우고 하안거 결제가 끝난 뒤에는 장흥 보림사 용암사주 처소로 나아가 ⟦기신론⟧과 ⟦금강경⟧ 등을 배웠다. 
⟦기신론필삭기(起信論筆削記)⟧ 간기(刊記, 전적 마지막 장에 간행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부분)에 와탈(訛脫, 글이나 글자가 잘못 전해지거나 빠져 없어 짐)된 곳이 많았지만 옛날부터 있는 그대로 답습(踏襲)하며 그 누구도 바로잡지 못했던 부분을 내가 초학자로서 분별해 정리하자 용암대로께서는 기특하게 여기시고 오래도록 머물게 하려고 하였으나 은로께서 따라 주지 않았다.
취서사 영곡사주를 찾아가 ⟦원각경⟧을 배웠으니 당시 나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다.

▲가지산 보림사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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