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7대 인종의 왕비이자 의종 신종 명종 세 왕의 어머니
영암군 관할의 정안현을 장흥부로 승격 보성 강진까지 확장 

▲공예태후 사적지 정안사 앞 연못인 아지

공예태후 임씨(1109년~1183)는 1109년 음력 9월 7일, 전남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려시대 국가의행정을 총괄하는 중서문하성의 최고위직인 종 1품 문화시중 임원후이고 어머니는 진한국대부인 이씨이다.

고려 17대 인종과의 사이에서 고려 18대 왕 의종, 대령후 왕경, 원경국사 충희, 19대 왕 명종, 20대 왕 신종, 승경궁주, 덕녕궁주, 창락궁주, 영화궁주의 5남 4녀를 낳았고, 고려 21대 왕 희종, 22대 왕 강종의 할머니이다. 또 장흥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고려 시절 장흥은 영암군 소속의 정안현이었으나, 인종이 직접 ‘길이길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장흥부로 개칭하여 승격시켰다. 공예 태후의 탄향지는 천관산 아래 관산 딩동이 친정이며 오늘날 장흥임씨로 불리는 임씨들은 원래 정안 임씨다.

태후가 태어나기 전날인 6일 밤이다. 태후의 외조부로 문하시중을 역임한 원로 정치인 이위(李瑋)가 꿈을 꿨다.
“꿈이 예사롭지가 않구나.” 꿈을 깬 이위가 나지막이 혼잣소리를 했다.
꿈에 이위는 넓고 긴 황색기를 자신의 집 중문에 세웠다. 그 깃발이 바람에 휘날려 궁궐인 선경전(宣慶殿) 치미(?尾)에 이르렀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외손녀가 태어났다는 소식이 왔다. 황색의 깃발은 왕을 상징했다. 더욱 궁궐의 치미를 감싸며 용마루에 닿도록 나부꼈으니, 길조 중의 길조라 생각했다.
“앞으로 내 외손녀는 선경전에서 놀게 될 것이다.” 이위는 그리 예언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위의 외손녀가 계례를 치를 15세가 되었다. 혼처가 났으니, 상서성의 정 2품 관직인 평장사(平章事) 김인규의 아들 김지효였다.

마침내 혼롓날이었다. 신랑 김지효가 신부의 집에 이르렀는데, 신부가 병이 났다. 갑자기 혼절하더니, 거의 사경을 헤매는 지경이 되었다. 결혼식은커녕, 장례식을 치를 형편인지라, 임원후는 혼례를 사절하고 신랑을 돌려보냈다. 의원을 불러오는 등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깨어나지 못하자, 임원후는 마지막 수단으로 점쟁이를 불러 병점(病占)을 치게 했다.

“우리 아이의 병세가 어찌 되오?” “근심할 것 없소이다. 이 처녀의 운세는 비할 바 없이 고귀하니 반드시 왕비가 될 것이요.” 점을 치고 난 점쟁이의 표정이 밝았다. 병이 아니라, 왕비가 될 운명을 거스르고 혼례를 치르려 해서 갑자기 아픈 거라고 했다.

그 병점을 치고 난 뒤다. 임씨 처녀는 거짓말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임원후 집안의 이 일이 소문이 났다. 당시 고려의 실권자는 이자겸이었다. 이미 자신의 두 딸을 고려 왕 인종(1109~1146)에게 왕비로 출가를 시킨 터였다.
그런데 임원후의 딸이 왕비가 된다는 것은 이자겸 자신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자겸은 이 사실을 인종에게 고한 뒤, 임원후를 개성부 태수로 강등시켜 버렸다.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된다는 점쟁이의 말을 다 믿은 건 아니지만, 소문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 임원후의 마음은 싱숭생숭이었다. 그렇게 일 년여가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아침 일찍, 개성부의 판관이 예복을 갖추어 입고 내아로 임원후를 찾아왔다. “어쩐 일인가?” “꼭 알아두십시오. 태수님 댁에서 반드시 큰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판관이 꿈 얘기를 했다. “어젯밤 꿈에 개성부 청사의 대들보가 벌어지며 큰 구멍이 생겼지요. 그러더니 그 구멍에서 황룡이 나왔지요. 이는 필시 태수님 댁에 큰 경사가 있을 길조입니다.” 판관의 이 꿈이 맞아떨어졌다.

1126년 2월 25일이다. 이자겸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의 자리까지 넘보고 왕비인 자신의 넷째 딸을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 했다. 그러나 왕비의 지혜로 인종은 독살을 면했고, 1126년 음력 5월에 이자겸의 난은 진압이 되었다.
더하여 이자겸의 두 딸도 폐비가 되어 쫓겨났으니, 새 왕비 간택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 인종이 ‘들깨 5되와 황규(黃葵) 3되’를 얻는 꿈을 꿨다. 그 꿈 얘기를 병부상서를 지낸 척준경에게 했다.

“들깨(荏)란 임(任)입니다. 임씨 성의 후비를 맞이할 예시입니다. 또 그 수가 5이니 다섯 아들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황규는 해바라기입니다. 임금 황(皇), 헤아릴 규(揆)이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법도입니다. 따라서 황규는 법도를 바로잡고 국가를 통치할 임금을 말합니다. 또 그 수가 3이니, 다섯 아들 중 세 분이 국왕이 된다는 말입니다.” 척준경의 해몽에 인종은 기분이 좋았다. 이때에 임원후의 딸을 왕비로 천거한 사람은 내의원인 최사전이었다. 최사전은 사돈 간인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시켜 이자겸의 난을 마무리한 인종의 공신이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인 1126년 6월에 궁중혼례가 있었다. 이위의 꿈, 개성 판관의 꿈, 인종의 꿈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17세의 임씨는 왕비가 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라고 했다.
1127년 맏아들 의종(毅宗)을 낳았으니, 고려의 제18대 왕이다. 인종은 기뻐하며 사신을 보내 조서와 함께 각종 귀한 선물을 보냈다.
1130년 둘째 아들 대녕후(大寧侯) 경(暻)을 낳았다. 1131년 셋째 아들 명종(明宗)을 낳았으니, 고려의 제19대 왕이다.
이어 훗날 원경국사가 된 넷째 아들 충희(沖犧)를 낳았다.
1144년 다섯째 아들 신종(神宗)을 낳았으니 고려의 제20대 왕이다.

또 임씨는 승경궁주(承慶宮主), 덕녕궁주(德寧宮主), 창락궁주(昌樂宮主), 영화궁주(永和宮主)의 네 딸을 낳았다.
1182년에 넷째 아들 충희가 죽었는데, 몇 달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고 병을 얻었다.
1183년이다. 치질을 앓던 다섯째 아들 평량공(신종)이 오랜만에 문후를 올리자, 관현악을 연주하며 즐겁게 놀았다. 잠시 병세가 호전되었으나, 곧 위독하여 11월에 별세하니 74세였다. 순릉에 안장하고 시호를 공예태후(恭睿太后)라 하였다.
이승의 영욕과 저승의 평안은 다른 듯 같은 함의어다. 장흥은 길게 흥함이고, 천관은 하늘의 왕관이니 공예태후의 은덕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 목 <동화작가>
함평출신으로 평생을 교육자로 지냈으며 전남도교육위원을 역임했다. 광주일보(시)와 중앙일보(동화)로 등단했다. 동화집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시집 「누렁이」, 연구집 「흰구름이거나 꽃잎이거나」, 기행집 「호남가 호남시를 따라서」 등을 냈다. 어린이해 기념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등을 받았고 문학전문계간지 「남도문학」 발행인이다.
 

▲장흥임씨 발상지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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