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앙정치권에 난무하는 화두다. 이는 서로 간에 해서는 안 될 말, 행동, 금지된 구역을 침범했을 때 일컫는 말이다. 넘어서는 안 될 어떤 한계를 넘어섰음을 꼬집는 말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지켜야 할 무수한 선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부모자식간, 부부지간, 형제간에도 해서는 안 될 말, 해서는 안 될 행동이 있고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간에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고 지켜야 할 선이 있어 이를 어기면 선을 넘는 것이 된다.

어찌 이뿐이랴,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정지선이나 차간거리, 지정된 선을 지키지 않으면 충돌하거나 추돌하게 된다. 지정 속도를 지키지 않고 과속하면 사고를 유발한다. 생명선이라는 도로의 중앙선을 넘으면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차량에 날벼락의 애먼 피해를 주게 된다.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아 본인은 물론 타인에게도 손해를 입히게 된다.

농촌인구 감소 및 고령화로 인해 과거에 비해 많이 쇠락했지만 아직도 농촌의 5일장은 그런대로 정이 넘치는 곳이다. 5일장이 서는 장날이면 시장진입 도로가 막히지만 이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기보다는 일시적인 작은 불편으로 여길 뿐이다. 그래서인지 장날의 무질서는 다소 통행이 불편해도 오히려 사람사는 살가운 분위기로 받아들인다. 불편하지만 매일 그런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거나 큰 행사가 있는 날이기에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잠시 권리를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호의가 지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착각한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발생한 불로소득은 또 다른 누군가의 손해로 얻은 반사이익이다. 공공이 이용해야 할 도로를 불법 점용한 것은 불특정 다수인이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누려야 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베푼 지속적인 호의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권리로 착각한 것이다.

읍내 시가지를 다니다 보면 장날도 아니고 축제나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님에도 문화지수가 높은 군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선을 넘어버린 현장들이 눈에 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이 일시적이지 않고 상습화 고착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어떤 곳은 적치물로 인해 차량 통행은 물론 보행자가 걸어 다니기에도 불편하다. 차량이 한 번에 꺾어 지나가기도 어려운 교차로, 장날이 아님에도 가게 앞 도로에 내놓은 파라솔 때문에 트럭은 아예 진입하기조차 어려운 곳도 있다. 다수기 이용해야하는 도로임에도 이미 사유화돼버린 느낌이다.

애초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선을 잘 지키다 주위의 무관심 속에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어버린 것이다. 이동이 가능한 파라솔을 내놓은 곳은 애교이고 아예 도로에 철주를 박아 가게를 확장해 버린 곳도 눈에 띈다. 한 다리만 건너면 사돈네 팔촌인 작은 지역인데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묵시적 동의, 너도 하는데 난들 못할 소냐 하는 경쟁심리도 한몫 거들었으리라. 이는 깨진 유리창이론처럼 발견초기에 이를 해결하지 않고 방치한 결과다. 불치병이라는 암癌도 조기발견시 치료가 가능하듯 불법 무질서에 대해 누군가가 눈치를 주었거나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1980년 초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은 사소한 실수나 무질서를 방치하면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발표했다. 평소에 자신이 자주 지나던 거리의 차량에 누군가 돌을 던져 유리창이 깨져 있었는데 다음 날에도 그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면 차량 주인이 없거나 관리되지 않은 방치된 차량으로 알고 또 다른 누군가가 돌을 던져 그 유리창을 깨뜨려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가 전파되어 결국은 무법 상태에서 모든 유리창이 깨지는 상황이 벌어져 방치된 자동차가 형편없이 망가지고 낙서로 도배되어 결국은 그 일대가 불법 무질서가 판을 치게 된다는 이론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시가지가 무질서하게 되면 인근 주민들이 겪는 불편은 차치하고 우리 지역을 방문한 이들에게 그 골목 그 도로는 무질서하고 통행이 어렵다는 인식이 퍼져 해당 골목의 상권활성화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를 들면 식당의 화장실이 더러우면 고객이 그 식당의 주방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어도 주방 역시 더러울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어 그 식당이용을 꺼리게 되는 것과 같다. 깨진 유리창을 빨리 수선하거나 방치된 차량을 얼른 다른 곳으로 옮겨 정해진 선을 지키도록 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계산법이 있다. 작은 배려와 친절이 수백 배의 승수효과를 낳기도 하지만 무심코 방치한 무질서가 전체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1+1=2라는 정수를 이용한 유클리드호제법 계산이 있는가 하면 에디슨 주장처럼 물방울 하나에 물방울 하나가 더해지면 엉켜 커다란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1+1=1이 되기도 한다. 시너지 효과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1+1=3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100-1=0이 되지 않도록 이왕이면 작은 것부터 함께 지키는 질서를 통해 100+1=200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길을 걷다가 또는 생활주변에서 지켜야 할 선을 넘은 곳을 보면 호의를 넘어 공동의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음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선을 넘은 것 같은데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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