余屛居明德山中 無所寓心 日讀聖賢書以爲課 頗恨箋註繳繞 反使經旨晻翳者有之 日 方丈僧春坡堂義一 袖憕寤所撰霜月大師狀 來請銘 余儒者徒也 師之狀奚爲於余之門 春坡留半載乞食 不獲不歸 試閱其狀 犂然有契余意者 嗚呼 註說之支離 儒與釋奚異 其狀曰 師名璽篈 俗姓孫 順天人也 母金 於浴佛夕 夢梵僧授一顆珠 已而有娠生師 肅宗丁卯也 十一 投曹溪之仙巖寺極俊長老 十六 受具於文信大師 十八 參雪巖和尙 道旣通 衣鉢歸焉 遍參碧虛南嶽喚惺蓮華 皆獲其心印 二十七 歸故山 開演三乘宗旨 四方緇流多歸之 無用和尙 聞師譚理 歎曰 涉安後一人也 師常以講明眞解心踐智證爲法門 不以初學而忽覺路之示 不以高才而略戒律之講 尤以註說之桎梏爲憂 必使學者離文取意 洞見本源 無徒幻相於空寂 必以吾心作佛心 又曰 引證卽質驗之義 而註語跛屑 以致儒家之譏斥 然儒家所稱未發氣象 卽吾佛家如如理也 其所謂太極 卽吾佛家一物也 其所謂理一分殊 卽吾佛家一心萬法也 由是而引證上下 何嘗有儒釋之別耶 又曰 學者如無反觀工夫 雖日誦千言 於心性何關 又曰 如無專己工夫 不受信心人所供 此古語也 吾於一日念頭不著實工 則便對食而媿 飯匙亦减 又曰 無其實而有虛名者 最干天誅 而學佛者爲尤甚 盖佛心如燈 尤不可自欺也 是故爲龍象所宗師三十餘年 化及門徒 殆近世罕有也 日輒誦一佛五菩薩千聲彌陁佛 千聲皆以數珠數之 若甚病廢課 待少間計數而足之 恤隱問死 必先最竆賤者 有怒旋忘 初 若無怒 雷雖微 夜不卧聽 齋磬有聞 雖病必扶起 域內以名山特聞者 無所不到 甲戌春 在仙巖寺 設華嚴講會 會者千有二百餘 會之盛 古亦未有也 禮部署禪敎都摠攝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 此外物也 常曰世所云舍利 吾常疑是眞是贗 吾西山祖生而有齒齦 身後奉骨 精虔得五顆 此理最眞 吾沒 須持吾骨 以請於香山 庶幾有冥應 英宗丁亥十月 有微疾 召門徒曰 吾將行矣 子等珍重 遂口授一偈 水流元去海 月落不離天 怡然順世 世壽八十一 法臘七十 紫雲翳空 七日乃滅 羣弟子述其德行之美 加號曰平眞大宗師 平取實德 眞取實行也 及茶毘無所得焉 僧卓濬奉骨至關西之香山 將設醮如例 同行僧朗聰菴主二僧 俱得神夢 夜起以燭之 重封有孔珠見者三 遂起浮屠於悟道山 以其一安焉 龕以石藏以靈骨 以其二 各安於順天之仙巖 海南之大芚云 嗚乎 吾儒斥佛氏 欲人其人火其書 爲佛氏徒者 雖不敢顯訾吾儒 其心之不相能 安知不如吾儒之於渠家 而師乃以其道附於儒 引證上下 欲同其異而異而同 雖未知其言之合於理以否 然揚子雲所稱在夷狄則進之者庶幾焉 况其不桎梏於註釋 非有玅解獨得 其可以道得此乎 余所以相感者 在於此而不在於珠顆之神與不神爾 廼作銘 銘曰
骨耶珠耶 三顆之熒熒 衆緇以爲靈 吾亦不妨乎還佗靈
출전 채제공<樊巖先生集>卷之五十七
나는 명덕산중에 숨어살았는데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날마다 성현의 글을 읽는 일로 일과를 삼았으니 전주(箋註, 주석注釋)가 교요(繳繞, 뒤얽히다)해 자못 한스러웠고 도리어 경전의 본뜻을 가려 어둡게 하는 곳이 있었다.
하루는 방장승(方丈僧) 춘파당(春坡堂) 의일(義一)이 문인(門人) 증오(憕寤)가 쓴 상월대사(霜月大師) 행장을 소매에서 꺼내 놓으며 비명(碑銘)을 써주기를 요청했다.
나는 유자(儒者)의 무리인데 무엇 때문에 나의 집에 와서 대사의 행장을 써달라고 하는가.
춘파당은 반년을 걸식하면서 머물렀는데 얻은 것이 없자 돌아가지 않았다.
그 행장을 한번 살펴보자 의심이 확 풀리고 나의 뜻과 계합(契合)하는 곳이 있었다.
오호라, 기록하여 설명을 덧붙인 것이 무질서(支離)했구나. 유(儒)와 불(佛)이 어찌 다르겠는가. 그 행장에 이르기를,
대사의 이름은 새봉(璽篈)이고 속성은 손씨(孫氏)로 전라도 순천사람이다.
어머니 김씨는 성대한 욕불(浴佛)의 법회(法會)를 여는 저녁에 범승(梵僧)이 구슬 한과(一顆)를 주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이 되어 대사를 낳았으니 숙종 정묘년(숙종13년1687)이다.
열한 살에 조계산 선암사 극준 장로(極俊長老)에게 기탁하여 열여섯 살에 문신 대사(文信大師)에게 구족계를 받고 열여덟 살에 설암화상(雪巖和尙)에게 참학(參學)하여 도(道)에 이미 통달하자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돌아갔다.
벽허(碧虛)·남악(南嶽)·환성(喚惺)·연화(蓮華) 등(等)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두루 참방(參訪)하고 그들의 심인(心印)을 모두 얻었다.
스물일곱 살에 고향산천으로 돌아가 삼승(三乘)의 종지(宗旨)를 연설하자 사방 승려들 대다수가 귀의(歸依)했다.
무용 화상(無用和尙)은 대사가 말한 이치를 듣고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환성 지안(喚惺志安,1664~1729) 이후에 한사람이 나왔구나.”라고 했다.
대사는 항상 강명(講明)·진해(眞解)·심천(心踐)·지증(智證)을 법문으로 삼고 초학자(初學者, novice)라고 해서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기를 갑자기 하지 않았고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서 계율의 강연을 생략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주설(註說, 설명을 덧붙임)의 질곡(桎梏, 구속)을 근심하여 반드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글(文)을 떠나 뜻(意)을 취하게 하였고 본원(本源)을 꿰뚫어보아 부질없는 공적(空寂)에 대한 환상(幻相)을 없애고 반드시 나의 마음에서 불심(佛心)이 일어나도록 했다.
또한 말하기를, “인증(引證, 글 따위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음 )이 곧 질험(質驗, 대질하여 따져 묻다)의 올바른 방법이다. 그러나 주석하는 말이 절뚝거리고 잗달기(파설跛屑) 때문에 유가의 비난과 배척을 불러들인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미발기상(未發氣像)은 바로 우리 불가의 여여(如如)한 리(理)이다. 그들이 말하는 태극(太極)은 바로 우리 불가의 한 물건(一物)이며 그들이 말하는 이일분수(理一分殊)는 바로 우리 불가의 일심만법(一心萬法)이다.
이로 말미암아서 전후와 상하를 일관되게 인증했다면 어찌 일찍이 유교와 불교의 차별이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또한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돌이켜 보는 공부(返觀工夫)가 없다면 비록 하루에 천 마디를 외우더라도 심성(心性)에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만약에 자기를 전일하게 하는 공부(專己工夫)가 없으면 사람들이 공양하는 신심(信心)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은 옛사람들이 말했다. 내가 하루라도 마음속에 착실하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바로 밥을 대하여도 부끄러워서 밥숟가락을 덜어 낸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그 실속이 없이 헛된 명성(虛名)만 있는 자는 가장 먼저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니 부처를 배우는 자들에게는 더욱 심하다. 부처의 마음은 등불과 같아서 더욱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다.”라고 했다.
이런 까닭으로 종사(宗師)의 삼십여 년 수행생활은 고승대덕(龍象)들에게 교화를 받아 문도(門徒)들에게 까지 미쳤으니 거의 요즘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매일 번번이 일불 오 보살을 천 번 부르고 아미타불을 천 번 외웠는데 천 번 모두 염주를 세어 가며 헤아렸다.
만약 몹시 아파서 일과를 폐하였어도 병이 조금 우선하면 숫자를 계산하여 꼭 채웠다.
백성들의 딱한 사정을 가엾게 여겨 생사를 물으면 반드시 가장 빈궁하고 천한 자를 우선시했다.
화를 내더라도 금방 잊어버려서 마치 처음부터 화를 낸 적이 없는 것과 같았다.
우레 소리가 비록 작더라도 밤에 누워서 듣지 않았고 재(齋)를 알리는 경쇠 소리를 들으면 아플 때라도 반드시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역내에 명산으로 특별히 소문난 곳이 있으면 가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갑술년(영조30년1754) 봄 선암사에 있을 때 화엄강회(華嚴講會)를 개설했는데 모인 사람이 일천 이백여 인이었으니 이처럼 성대한 모임은 옛날에도 있지 않았다.
“예부서 선교 도총섭주 표충원장 겸 국일 도대선사(禮部署禪敎都摠攝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이 관직은 외물이다.
대사는 항상 말씀하시를, “세상에서 말하는 사리(舍利)라는 것은 나는 항상 이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의심하였는데 우리 서산 조사(西山祖師)께서는 나면서부터 치은(齒齦)이 나 있었으니 돌아가신 후에 유골을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받들어 사리 5과를 얻었다. 이 이치는 가장 진실하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묘향산에 가서 청하면 거의 명응(冥應)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영조 정해년(영조43년1767) 10월 가벼운 질병이 있었는데 문도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 장차 가려고 하니, 그대들은 진중하라.”하고는 마침내 게송 한 수를 읊어 주시기를,
“물은 흘러서 원래 바다로 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네.(水流元去海,月落不離天)″”라고 하시고는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세수는 81세요, 법랍은 70년이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니 이렛날 만에 사라졌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