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 목화꽃이 다 떨어지고 국화전시회가 열리고, 야구시합이 끝나면, 첫 눈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 그 죽음의 시그널이 또 시간의 축적물인 추억들을 불러온다. 
무정한 세월! 단절과 고독속에 갇힌 쭉정이들 노인, 은퇴자들의 커피잔은 우울과 슬픔의 호수다. 그들에겐 그나마 향수라는 그늘이 있기에 다소 위안이 된다.
필자에게도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1960년대 중,고학창시절의 향긋한 추억노트가 남아있다. 빛 바랜 흑백사진속에 담긴 그리운 얼굴들을 쓰다듬으며 모처럼 친숙했던 국민교육헌장과 쑥덕바지와도 교감 하노라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우정, 스승, 연인, 소풍, 방학, 졸업식,시험, 엽서, 극장, 빵집, 삼각관계등 태마의 소재는 다양하고 끼는 넘친다.
그 첫장은 언제나 스승님과의 만남에서부터 거슬러간다.
필자의 자랑스런 모교 장흥중,고의 사도의 서품에서 그 위상이 대부격인 남전 김용술 선생님을 필두로 최병태,유정운 선생님 세분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중 특히 곧은기개와 선비적인 풍모가 김삿갓의 풍류를 연상케하는 김용술 선생님의 농담이 흔들리지 않는 전설바위처럼 고향의 무게를 대변한다. 중학시절 어린이 합창단을 “아이들 노래떼”라는 스승의 조크는 학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했다.
다음은 소탈하면서도 근면한 맑은 성정의 농학자 최병태 실업선생님의 담백한 미소가 평화롭고, 바로 그 곁에는 온화하면서도 냉정한 성리학의 도덕적 규범이 녹아있는 유정운 선생님의 겸허한 침묵이 주위의 허영과 거짓을 행궈내며 맑음을 깨운다.
이해심 많고 숫기없는 선생님, 학생들을 편하게 대하고 친절한 말투로 명확하고 정확한 질문만을 던지고 학생의 답변을 중간에 끊지않고 끝까지 들은뒤 별다른 말없이 넉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그만 가 봐도 좋다고 말해주는 선생님!정녕 이 세분이야 말로 저마다 그 기품이 여유와 위엄의 상징인 홍곡처럼 높은곳에서 제자들의 주변을 살피시고 품어주신 존엄한 스승의 사표이셨다면 비단 필자만의 주제넘는 표현일까?
어쩌면 그 시절 결이 다른 서양문화의 격류에 휩쓸린 청소년들의 거센 저항을 격돌없이 순탄하게 타이르는 방향키의 기초성역은 학교라는 문이었다.
그와같은 풍토에서 10대들의 한창 물오른 예민한 감성을 자극하며 이들의 미래를 조감하는 스토리를 제공해주신 젊은 선생님들의 독특한 케릭터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맨 앞줄에 국립대학 정치학과 출신의 호방한 인품에 훤출한 외모가 부잣집 귀공자를 빼닮은 퇴근길 선술집의 단골 취객 최광우 선생님을 꼽는다. 그는 진보적 사고와 관대함의 지성으로 제자들과도 자유롭게 소통하였다.
다음은 경쾌한 푸트웍과 날렵한 잽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기교의 알리 정해상 체육선생님과 그와는 대척점인 저음의 바리톤에 묵직한 펀치의 저돌적인 복서 조프레이저 스타일의 김용석 지리 선생님, 두분께서 맏형처럼 우리 곁을 지켜주셨다.
과묵하면서 보스 기질의 마스크에 취미가 등산인 김용석 선생님께서 일찍 요절하셨다는 비보를 듣고 제자들은 한없이 슬퍼했다.
이제 분위기를 바꿔 여선생님 한 분의 매력을 들춰본다.
볼륨있는 몸매에 지적인 욕망을 절제하려는 차가운 눈매의 무용수 발레리나 장옥희 선생님의 뛰어난 감각과 리더쉽의 카리스마가 주목을 끌었다. 선생님께선 무대 위 소녀들의 잘록한 허리를 유연하게 길들이는 한편, 단발머리와 투박한 스커트를 세련된 트랜드로 변화시키는 아우라를 지닌 패션 디자이너의 역할도 한몫 하셨다.
그런데 세상 어디서든 사람들의 질투란 끝이 없다. 기계체조, 중간체조, 트레이너 정해상과 백조의 호수 연출가 장옥희를 그럴싸하게 교묘히 엮어 황당한 염문이 나돌더니 얼마 못가 거품처럼 가라 앉았다. 
알고보니 장난꾸러기 얄개들이 지어낸 반짝 가짜 뉴스였다. 하마터면 알만한 한 명문가의 현숙한 종부가 어염집의 음탕한 유부녀로 욕될 뻔했다.
체육과목에 못지않게 음악 선생님의 미려한 악보와 미니 잠자리체 콘닥터도 일품이었다. 아리랑과 칸소네의 간극을 유려하게 접목시킨 음악성에 가곡 가고파와 라팔로마를 청량한 음색으로 꼿꼿하게 발성하신 테너 고지복 선생님의 핸섬한 마스크에 링컨의 사진이 겹친다. 선생님의 나비넥타이와 턱시도의 경건함에 익숙하기까지 우린 최소한 3년을 보내야 했다. 
특히, 학교 행사때나 국경일 시가 행진때마다 종잣돈 보리닷되로 창단한 “장흥고 악대부”의 우렁찬 연주는 군민들의 절대적인 성원과 사랑을 받았다. 군 사관생도의 꿩털모와 노란 맨드라미 휘장을 벤치마킹한 화려한 의상에 성난 트렘펫과 큰 호박덩이만한 드럼이 협주한 행진곡 “자이언트”의 박진감 넘치는 리듬은 당시 수척했던 고향의 활력을 고무시키며 흥분 속에 학생들에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는 석탄이 되었다. 조용한 고을의 지축을 쿵쿵 울리던 악성, 그 내면에는 선생님의 고뇌의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필자의 가슴속에는 잘 영근 특별한 에피소드 몇줄이 웅크리고 있다. 바로 인연이 깊은 은사님들과의 의미있는 스토리는 나의 성장기 취미와 진로에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평생 동안 날 행복하게 그 속에 가둬놓고 놓아주질 않는다.
고교 진학을 얼마 앞두고 김용술 선생님께서 국어과목에 재능을 보인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어느 고교를 지망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실력보단 욕심이 앞서 당시 호남의 명문인 광주 제일고를 희망했더니 선생님께서 한참 생각에 잠기시고 나서 “글쎄 거긴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좀 약한데”하시며 한단계 낮은 광주고를 추천하신다. 단번에 기가 꺾인 나는 결코 만만찮은 광주고에 응시하였는데 그 마저 실력이 딸려 수험번호 72번은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두체급 낮춰 후기 장흥고에 진학하게 된 부끄러운 사연의 고백임이랴,
필자가 성인이 된 훗날 우연히 시내 한 음식점에서 옆좌석에 계신 선생님을 뵙게 되었는데 스승께서 향기 머금은 표정으로 추억을 회상하시며 “그래 그때 참 영리했어, 우등생이었지, 또 친구들을 꽁무니에 달고 다녔었지!” 나를 격려하여 주신다. 아마 좌중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취지에서 배려해 주신 보너스였다.
나는 무안한 나머지 약주 한 잔 공손히 올리고선 바쁘단 핑계로 도망치듯 자리에서 떠났다. 혹여 한 질 컷다고 스승님 앞에서 불경스런 언사라도 튀어나오면 어쩌나 염려되고, 또 한편 스승의 기대에 못미친 제자의 자격지심 때문에 위기의 분위기에서 미리 탈출한 지혜였다. 
최근에 와서 지역의 원로 후학들이 정성을 모아 스승의 약력을 새긴 기념 표석을 취지에 맞게 정남진 장흥도서관 입구 화단에 세웠다. 
함흥고보와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신 재원으로 고향 장흥에 현대문학의 뿌리를 돋우신 선생님을 기리며 고인의 애목 “들꽃나무”를 잘 다듬어 함께 편히 쉬시도록 표석 윗목에다 눕혀 놓았다.
필자가 간혹 마음이 심란하고 문장이 막힐때면 찾아가 은사님의 영혼에 기대어 정신을 추스리고 중심을 잡는 명소이기도 하다.
다음은 인기짱 최광우 선생님과의 코믹한 스토리다. 한번은 영어 수업시간에 HomeTown(고향) 발음을 내가 “곰탕”이라고 하자 교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선생님께선 어디서든 나만 보이면 “어이 곰탕!”하고 호명하셨고, 나란 명칭은 졸지에 곰탕이라는 명사가 따라 붙어 옆집 짜장면 홍보대사까지 겸사 귀여움을 독식했다.
그런데 선생님 또한 필자를 뛰어넘는 익살이 발군이다. 
요는 school(학교)의 발음을 놓고 마치 학생들이 숯굴에서 구어진다는 의미의 “숯굴”이라며, 또한 Teacher(선생님)의 발음을 놓고도 선생님은 숯굴에서 학생들에게 시달려 파김치처럼 디쳐지므로 “디쳐”로 해석하는게 맞다며 여백에 훈민정음의 운치를 깔아놓는다.
이 얼마나 해학과 낭만이 버무러진 진보한 가설의 비약인가?
또, 한칸 건너방 화실에 선생님 한 분이 깊은 사색에 잠겨 계신다.
인형처럼 단아한 용모에 호소력있는 보이스, 사서적 영혼이 감도는 화백 엄용준 미술선생님의 모습이 왠지 자신의 중량이 무거운 듯 쓸쓸하게 보였다.
필자는 선생님으로부터 맨 처음 세계 문학사의 거장들의 기호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매료되었다.
처칠의 시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황금술잔, 제임스 조이스의 지팡이, 윌리엄 포그너의 파이프 등은 달아오른 나의 호기심에 성냥을 그어 오늘날까지 낭만을 탐닉하며 문학의 불씨를 지핀 심지가 된 것이다. 선생님께선 그런 나를 예지로 밝혀 내신 듯 고3 미술시간에 결코 조각상이 못된 나를 교단위 의자에 앉혀놓고 급우들에게 과제물로 그리라고 했고, 나는 자세를 흐트렸다간 화공들의 시선에 방해될까봐 부끄러움을 인내하며 주인이 내려놓을때까지 마치 정물화의 화병처럼 고정된 위치에서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런 정서에 물들어 그 당시 전국 유일한 청소년잡지 “학원”을 애독하며 슬기를 키워갔다.
더불어 내가 10대때 읽은 초원의 집이나 외로운 어린왕자 등 감상적인 소설에서 발전 서사문학의 명료함과 신화가 지닌 다양성을 갖춘 윌리엄 골딩의 명작 “파리대왕”에 심취하게 된 동기부여의 시점이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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