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서 
이제 마지막 교실 고3 박경섭 담임선생님을 찾아 뵙고 문안드릴 차례다. 강직하고 꾸밈없는 성품에 인도의 성자 같은 크고 둥근 크렁크렁한 눈이 매력적인 선생님, 하지만 원래 얼굴 피부가 붉은데다 급한 성격 때문에 대단찮은 호통애도 학생들의 반응은 민감했다. 그땐 학교 교칙도 엄격했다. 특히 전국 최초 남녀고교 공학이라는 교육정책의 허점을 이용하여 상아탑 안에서 조숙한 이성간에 교류하는 억압된 순정의 분출구인 “러브레터”마저 금기 사항이었는데 어쩌다 그 기밀이 선생님께 발각되어 동료들 앞에서 호되게 문초당하는 형극은 차마 보기에 딱한 청춘이 건너야 할 숙명의 강이었다.
필자와 같은 반이었던 이들 화제의 주인공 주거석이와 김머숙이의 순애보는 기어코 그 강을 건너 천생부부로 올인 하였다는데 지금은  무르팍위 손자들의 재롱에 숨이 차 있다나,
우리들 동년배보다 나이가 한 두 살 위였던 그들은 가슴에 뭔가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안고도 거동부터 태연하게 어른스러웠고 생각도 앞섰다. 
그처럼 삼엄한 환경속에서 언젠가 필자가 무단결석을 하고선 다음날 닥칠 처벌에 겁이났다. 궁지에 몰리니 생존의 용기가 치솟는다. 당장 급전을 차용 삼학 소주 됫병을 사들고 으슥한 저녁시간 선생님 사택을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그때 곁에서 상냥하게 반겨주시던 사모님의 배려에 나는 긴장을 풀고 여유로울 수 있었다.
다음날 계산은 맞아 떨어져 출석 점호시간 말미에 평소 선생님 답지 않게 무단결석 죄목의 단죄를 엄하게 추궁하지 않고 주의 정도 꾸지람으로 슬그머니 눈감아준 것이다.
속사정을 알 리 없는 급우들은 그저 오늘 선생님의 컨디션이 좋은날이라고만 해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줄기에는 지난밤 나와 숙의했던 묵계가 숨어있을터, 정겹던 시절 사제지간의 미담과 현대판 뇌물비리 특혜가 극명하게 비교되는 대목이다.
또 한편으론, 선생님께서 한 때 탈선했던 여수 부둣가 주먹 세계의 체험담을 자랑삼아 털어 놓으면서 사나이 의리를 호언 했는데, 그 코란을 보란듯이 지켜주신 맥락일 수도 있다. 오늘날 정치권에서 거래되는 심야의 외교와 정오의 특사는 그런 역사의 진행형이다.
물리학 전공이신 스승께선 재임시 전국과학경시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셨다. 말년엔 그 격에 어울리게 광주과학고 교장을 역임하셨으며, 은퇴 후에도 성향으로 보아 아직껏 뉴턴의 사과나무 아래서 만유인력의 의문을 캐고 있을 것으로 얼핏 짐작된다.
그밖에도 선생님들의 극적인 일화들이 수두룩하나 죄다 상정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한다. 다만, 기억에 남은 그리운 선생님들의 존함만이라도 목청껏 불러보며 사은에 감사하고 모처럼 해후의 위안으로 삼고자 함이다. 
이름하여 구제술, 구희두, 김내호, 김상철, 김찬기, 김호출, 김형연, 노봉기, 백금선, 손영호, 오용석, 이희갑, 전병곤, 천낙경, 황계연, 말코누나미술선생님 등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분들의 백묵가루 묻은 가냘픈 손목에서, 부릅뜬 눈에서, 담임선생이란 무거운 소명 속에서 제자들을 극진히 아끼는 사도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편, 학생들에게도 아침 등굣길 한가지 고민거리는 안고 있었다.
특히 비포장 살얼음 등판길, 손등을 호호불며 종종걸음 등굣길의 종착지 학교 정문 통과 검문 절차는 학생들을 긴장케 하였다. 거기다 무게 실은 책가방에 도시락, 체육복까지 힘겨운 도보였다. 어쩌면 가깝고도 고통스런 간이역, 마치 임검원의 검표 확인후 극장 출입이 허용되듯 학교 정문 입구에는 건장한 체격의 학생들로 선발된 규율부 어깨들이 턱 버티고 주변을 호령한다. 의상부터 나치 독일장교 차림의 국방색 가죽혁대에 경고용 호각을 쭈빗거리며 어깨엔 가장 공포스런 활자 “주번 완장”이 학생들을 은근히 위협하며 주둑들게 한다. 
 검문은 모자, 뺏지, 명찰, 두발, 신발, 지각 등 촘촘한 체크 항목중 단 한종목이라도 규정위반으로 찍히는 순간, 일단 정지 즉시 “가방 내려놓고 저쪽으로 가 있어! 명령이 떨어지고 대기중인 피고석 동료들과 함께 쪼글 뛰기, 풋샾 등 체벌이 집행된다. 그 시절 그깐 체벌은 교육특수 목적상 문교부의 승인 품목이었다. 하여 완장맨들의 위세는 막강하여 나도 완장 한번 차 봤으면 원이 없겠다는 넋두리가 나올 정도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입법 이전이라서, 억울하게 고스란히 당하고도 속수무책이었다. 우린 그렇게 통렬하게 완장을 체험했다.
완장의 최초 출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추측컨대 군대나 공사판 종교집단 기타 조직 단체에서 권위나 특권의식의 증표로서 조직의 체계적인 질서유지와 원활한 통제를 목적으로 최고 권력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의 표식일터, 그 권한은 오늘날 “을”을 야멸차게 지배하는 “갑질”이란 해머로 둔갑하여 그 기능은 아쉽게도 근본 취지를 무색케 힘없는 자들에게 고통스런 부적으로 배척받고 있는 것이다.
교정의 추억은 더 깊숙한 곳까지 삐긋이 열려있다.
교내 서쪽 탱자나무 울타리 사립문을 밀치면 나즈막히 오두막 단팥죽 집이 있었지, 집 주인은 모습에서 자상하면서도 강당진 기개의 중년 촌부, 코묻은 돈 50원짜리 팥죽을 한사코 많이 먹으라며 넙죽한 국자 등으로 꾹꾹 눌러 퍼주시던 울엄마 같은 아줌마, 일명 용식이 어메의 살가운 모정이 머문 자리다.
바로 그 울타리 옆, 천장이 높은 학교 강당 유리창 틈 사이로 새벽녘이면 세어나오는 가녀린 피아니스트 소녀의 건반음에서 소년에겐 처음 여심(女心)에 대한 동경이 움튼 시기였다. 
세월은 흘러 20대 후반의 숙녀로 변신한 그 소녀로부터 어느날 경상도 대구의 한 음악다방에 있다며 필자에게 걸려온 러브 콜, 일순 보헤미안의 고독이 폭발하듯 한참 동안 지나간 여고시절, 자주색 책가방, 그리워라 보고파라 나의 동창생을 노래한다. 두 우정은 한 동안 뜨겁게 반응하다가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겼다. 그리곤 영원히 사라졌다. 아! 딜라일라 불꺼진 그대 창가, 어쩌면 집시와의 짧은 동거였다지만 그 행간에 달콤했던 세레나데의 곡조가 멈춘 순간 만큼 쿵심을 놓친 청년의 가슴에 일말의 싸늘한 물음표로 찍혀졌다. 
이제 모두가 흩어져가 다신 껴안을 수 없는 이야기들,
1960년대 필자의 중ㆍ고 학창시절 스승님들을 찾아 뵙고 그 시절 감정을 호소하고 만저도 보았다.
어쩌면 청정한 자연과 넉넉한 인정이 함께 호흡하며 이웃간에 하루 건너 나눠 먹고 좀처럼 찡그리지도 않고 허물을 감싸주던 포근한 세상, 필자는 그런 과거가 베푼 행복에 항상 감사한다.
지나간 아름다움이란 우리를 사로잡으며 매혹시킨다. 폐허에는 또 마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고귀함의 잔해 앞에서 느껴지는 우리의 내면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한때 드높고 고상한 광채로 빛나다가 스러진 유적은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비유하여 몰락한 재벌, 패망한 권력에 대한 향수의 서글픔 같은 연민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또 이렇게도 해석했다. “과거의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경험을 하는 순간에 생기는 감정은 잘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된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오직 과거에 대해서만 완성된 감정을 지니게 된다.”라고,
그럼에도 요즘 세상은 집단사고의 짓눌린 틀 속에서 각자 도생의 치열한 경쟁과 분화로 인해 감정의 창고는 핍박받고 그만큼 정신적 빈곤으로 삶은 척박하고 회의적이다.
하지만 우리들 곁에 아직도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은 온기가 조금은 남아있다. 우리 선조들은 옹달샘 위에 떠 있는 표주박의 달빛 서정에 자연과 친숙하며 시를 읇고 내 한몸 고되다고 그곳에다 함부로 발을 담구지도 않았다.
세월의 변덕에도 우리들의 근원 만큼은 감출수도,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다. 
오늘의 풍요에 포만하여 과거의 행복을 소외시키는건 역사를 망각하는 불충이요, 진정한 행복에 대한 무지이며 고결한 자아의 상실이랄 수 있을 것이다.
친애하는 장흥 중ㆍ고동문 후배들이여!
바라건데, 학창시절 우정에 몸살 앓고 스승과의 인연을 깊이 있게 조각하라. 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이 나타난다는 말이있다. 인연이 운명일지언정 마냥 기다리지만 말고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멘토의 문을 두드려라.그리고 모교의 창연한 모습에 긍지를 갖고 사랑하며 감사하자.
먼 훗날 내가 긴 여행에서 힘을 다 소진하고 다시 찾아올 이곳을,  끝.

▶김창석 프로필
용산면장 역임, 한국작가 수필등단, 한국작가협회 회원, 별곡문학 동인회원, 수필칼럼집 ‘세상의생각, 사람의생각’간행, 2020(문학춘추)수필부문 신인상수상, 칼럼니스트, 장흥신문논설위원, 고향의 사람과 사연들의 만들어낸 ‘사랑’과 이야기들을 지나치지 않고 자연속으로 끌어들이며 글쓰기에 정진하고 있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