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도 바다농사는 계속된다. 김 채취에 나선 사람들이 한 점 수묵화처럼 겨울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겨울에도 농사를 짓는다. 맵찬 바람 맞아야 하니 옷 두툼하게 입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비닐 장화를 신은 사람들이 통통배를 타고 김 양식장 사이를 조심조심 누빈다. 가까이서 보면 그런 행위조차 먹고살기 위한 몸짓이지만 멀리서 보면 한 폭의 그림이다. 겨울바다 같지 않게 잔잔한 물결 위로 양식용 깃대가 바늘처럼 곤두서 있다. 그 사이로 배가 빠져나가는 모습은 한 점 수묵화에 가깝다.

전남 장흥군 회진면 삭금마을 앞바다 일대는 지금 사람들의 김 채취 손놀림으로 분주하다. 그러나 삭금마을에서 작은 산자락 하나를 타고 오르면 만나게 되는 진목마을 사람들은 농한기를 즐기느라고 바쁘다. 즐기는 것은 편한 말로 근심 걱정 내려놓고 일단 놀고 보는 것. 이귀심(69)씨는 며느리가 부엌에 있는 사이 고스톱 방을 데우기 위해 근처의 ‘빈집’을 향해 나선다. 고스톱을 하는 짬짬이 식사를 챙겨야 할 할머니들도 있으니 전기밥솥 코드도 꽂아놓아야 한다. 그래 봐야 10원 내기 고스톱이지만 내기인 것만은 분명하니 내기판을 제대로 챙겨놔야 하는 것이다.



◇정남진 앞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슴앓이 섬. 소설가 이승우의 소설 ‘샘섬’의 소재가 된 곳이다.

“이기 다 할머니들 밑천이지라.”

이귀심씨가 군불을 지핀 다음 펄펄 끓는 방으로 들어가 벽장 문을 열고 할머니들이 알뜰히 챙겨 놓고 간 돈 보따리를 꺼내보이며 웃는다. 아침 먹고 슬금슬금 내려와 고스톱판을 벌이는 할머니들이 실상은 돈은 고스톱 치는 집 벽장에 모두 놓아두고 가는 것이다. 비닐 돈 주머니에 담긴 동전들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이래 봬도 텔레비전에 나가 맛 자랑도 했지라.”

이귀심 할머니는 밤 내내 달려왔더니 춥고 배고프다는 객을 향해 밥상을 차려 나오며 슬그머니 얘깃자락을 편다. 지난해 여름 진목마을에서 호박 축제를 벌였는데, 그게 빌미가 되어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와 맛 대결 하는 프로에 출연했다는 것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생가 방에 걸린 자료 액자들. 집도 방도 액자도 모두 수수하다.

“호박으로 만들 게 뻔하지라. 호박죽, 호박전, 이래저래 만들다 보니 만들 게 없어서 내가 호박술을 빚었지라.”

호박술이라는 게 있었을 턱이 없는데, 이귀심씨는 그래도 뭔가 새로운 상품을 내놓아야 할 것 같아 ‘연구를 거듭해서 호박술을 담갔더니 인기가 좋았다’며 웃는다. 호박 축제에 뭔가 기여해야 할 당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들이 호박 축제를 주관하는 이장을 맡고 있어서였다고 운을 뗀다. 그러니 호박술 자랑에 이번에는 아들 자랑까지 겹친 셈인데 할머니는 인기 탤런트인 양 ‘텔레비전에서 나를 못 봤느냐’고 되묻는다.

이귀심 할머니는 사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을 ‘시아재’라고 부르는, 이청준 선생의 사촌 형수이다. 그리고 이귀심 할머니가 고스톱을 치기 위해 군불을 때는 집은 장흥군에서 거금을 들여 복원한 이청준 생가이다. 그러니까 한쪽 방에는 대작가의 학창시절, 작가시절 사진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는데 한쪽 방에서는 할머니들이 모여 고스톱을 치는 게 ‘이청준 생가’의 안팎인 셈이다.



◇소설가 이청준의 사촌 형수 이귀심씨. 호박 술을 개발해 텔레비전에 나왔던 유명인이다.

“용인 사는 우리 시아재 집은 을매나 넓은지 어디가 어딘지 찾기도 힘들지러. 그래도 우리 시아재가 고향 왔다가 내가 없으면 요기서 이래 기다리지러. 우리 시아재가 똑똑하기도 하지만 을매나 착헌지. 핵교 다닐 때와 똑깥지러.”

이귀심 할머니의 호박 얘기, 이청준 선생 얘기를 들으며 밥 한 그릇 비워 내고 나와 보니 호박 체험관이 이청준 선생의 생가보다 훨씬 크고 멋스럽다. 마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 호박 축제 아이템을 구상했고, 그것이 생태마을 지정으로 연결돼 정부 지원금을 받아 지었단다. 마을 사람들도 이청준 선생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창작해 내는 능력을 지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진목마을은 영화 촬영지로, 생태마을로, 소설가 생가 문학기행지로 유명세와 더불어 짭짤한 수익 구조를 갖춘 형국이다.



◇진목마을에서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릴 것 없이 동거하듯 소 개 닭들도 한자리에 동거한다.

사람살이의 근본은 어울림이다. 진목마을에서는 그런 모습이 쉽게 느껴진다. 낯선 객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대신 ‘사진 찍으러 오셨구랴’ 인사부터 건네는데 인사를 받는 축이 민망할 지경이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50대에서 70대까지, 인생의 풍파를 웬만큼 겪어낸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거처 찾아온 사람은 잠시나마 함께 사는 것이라는 뜻일 터이다.

사람만 그럴까. 느티나무 아랫집의 외양간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도 함께 사는 가족들이 있다. 소 세 마리, 개 한 마리, 닭 한 마리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낯선 객을 향해 눈길을 던지고 있다. 그 눈길들이 모두 순해 빠져 보여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소도 개도 닭도 동네 사람들 심성을 닮았구나.

진목마을에서 나와 정남진을 향해 간다. 정남진이라니, 정동진은 낯익지만 아직은 낯설다. 하지만 드라마 한 편 때문에 정동진이 유명해지자 장흥군은 서울중심표시돌로부터 정방향 남쪽이 관산읍 신동리 사금마을이라는 것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정남진인데, 서울에서 일직선을 그었을 때 닿게 되는 북쪽의 중강진, 동쪽의 정동진과 같은 의미이다. 정동진이 드라마 ‘모래시계’ 때문에 유명해졌다면 정남진은 영화 ‘축제’ ‘천년학’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정남진 지역을 마라톤 코스에 맞춰 42.195㎞에 걸쳐 지정한 것도 재미있다. 다분히 스포츠 마케팅을 염두에 둔 느낌인데, 지난해 3월에 이어 올해도 3월11일 마라톤 대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마라톤 대회를 열지만 대회 본부의 캐치프레이즈는 ‘느린 세상’이다.



◇진목마을의 또 다른 이름은 ‘호박나라’. 호박축제 기간에는 마을 전체가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흥겨움에 빠진다(왼쪽), 남쪽 지방에 동백이 피면 봄은 멀지 않다. 장흥에는 이미 동백이 피었다.

봄기운이 만져질 듯 부드러운 해풍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동네 사람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건다.

“이 동네가 매생이로 유명하지라. 드셔 보셨소?”

나주 사람이 운영하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매생이 국 좀 더 달라고 했다가 ‘매생이가 을매나 비싼지 아요?’, 퉁박 한번 호되게 먹은 기억이 떠오른다. 동네 사람이 이내 화제를 돌려세운다.

“유명한 사람도 많이 나왔지라.”

얘기를 듣고 보니 한국화가 김선두도, 소설가 이승우도 사금마을 사람이란다. 아하, 그렇다. 해초처럼 가는 선을 자주 부리면서 바다색을 많이 쓰고 섬마을 소년을 자주 등장시키던 화가의 그림이 떠오른다. 고향집 앞 돌섬을 소재로 쓴 소설 얘기를 했던 작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 돌섬 이름이 가슴앓이 섬이라고 했었다. 가슴앓이 섬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뒤편은 천관산이다. 눈이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달려온 것이었는데 날씨는 맑고, 대신 눈 덮인 천관산이 농한기와 농번기가 공존하는 장흥 땅을 지켜보고 있고 그 옆에 이미 동백은 피었다.



임동헌

소설가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세계일보/2007.2.2.(금).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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