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동학농민 기념사업회가 모처럼 매우 의미있는 큰일을 해냈다. <장흥동학농민 혁명 사료집(이하 사료집)> 발간이 그것이다. 물론 晩時之歎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기존의 자료만 집대성한 단순한 사료집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장흥동학사가 기술한 글도 실었고, 특히 무엇보다 경탄해 마지않은 역사적인 史實을 실었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성과물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해도 전혀 넘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이번 사료집에서 기념사업회는 그동안 까맣게 책장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이두황의 진중일기, 물론 약사(요약본)이긴 하지만, 당시 동학군과 양민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동학군 토벌대의 일지를 입수, 번역해 실었다.

기실 그 일기는 1996년 역사문제연구소의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에 의해 발간된 영인본 <동학전쟁사료 총서 30권>의 제15권으로 발간돼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니 기이하게도, 그동안 동학이나 장흥동학을 연구해온 그 수많은 학자들도 이를 발견해내지 못했다. 아니다, 이번 사료집 발간을 위해 그동안 꼭꼭 숨어 수많은 학자들의 눈을 피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념비적인 사료집 발간을 위해 112년만에 장흥사람(김동철)의 눈에 띄었는지도.


어쨌든, 이번 사료집으로 장흥동학은, 더 한층 최후의 격전지로서의 위상과 역사성에 걸맞는 가치성을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동안 동학혁명 때 사망했거나 전투에 참여했던 농민군이 1백여 명에 불과, 동학최후의 격전을 치른 장흥동학 위상정립에 적지않은 걸림돌이 되었다.


수성군의 순직자가 99명이었는데도 농민군은 대동소이한 100여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석대전투 전후로 1만여 명이, 또는 2만여 명이 운집했다는 등의 기록들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두황의 진중일기에서 최소한 1천5백여 명의 동학군이 참살되었다는 기록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내며, ‘장흥동학’의 그 위대한 혁명사를 증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이두황 부대는 토벌과정에서 현장즉살 권한도 갖고 있었고, 수많은 동학군이 토벌 현장에서 살상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명단이나 숫자는 굳이 밝히지 않고 있어 기록상으로 나타난 숫자 외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동학군이 참살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여 기실 이두황 일기에 나타난 동학군 사망자 숫자는 기록만으로 나타난 숫자를 훨씬 상회하고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이두황의 우선봉 부대는 1894년 12월 20일 장흥에 진주, 동학군 토벌에 들어갔고 그 이전에는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부대가 12월 12일에 장흥에 들어와 18일까지 동학군 토벌작업을 착수했다. 그리고 이규태의 좌선봉일기도 <동학전쟁사료 총서 30권> 15권인가에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규태의 <좌선봉일기>도 입수, 번역 발간해 보다 명확한 장흥동학사가 쓰여져야 한다. 따라서 보다 완벽한 장흥동학혁명사는 이규태의 <좌선봉일기>를 통해서 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직도 미진한 장흥동학의 정체성을 명쾌하게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동학과 관련, 한 가지 덧붙이자면, 최근 알려지기로, 지난 17일인가 장흥동학 성역화 사업에 대한 용역의 중간발표회가 장흥군 의회회의실에서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군에서는 장흥동학성역화 사업 추진을 위한 사업의 타당성과 종합적인 프로잭트 등의 기초자료를 위해 지난 2005년에 장흥동학 성역화사업 용역비로 3천만원의 예산을 세워 지난 해 8월 전남대 고건축전문가에게 본 사업의 용역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용역의 중간발표회가 며칠 전에 열렸다는 것인데, 이 용역에 대해 미덥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다.


장흥동학 성역화 사업은 당연히 역사성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결국 그 사업은 문화 상품성까지 함유되어야 한다. 그런데 고건축 전문가의 용역이라고 하는데, 그 용역에서 문화적 마인드까지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혹자는, 이 용역과 관련, 당초 2005년에 본사업 용역비로 5천만원을 책정해 놓았지만 기년사업회 측의 수차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월시켰다가 2006년 8월경에서야 3천만원으로 수의계약용역을 급조하듯 추진, 졸속 용역이 아니냐며, 이에 대한 당국의 장흥동학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 다른 혹자는, 용역의 중간 결과 내용이, 140억원 상당의 중앙예산이 확보되어야만 가능한, 다소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고 거창한 비용이 투입되어야 가능한 사업으로 세워져, 결국 성역화 사업추진에 대한 구색 맞추기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한다.


장흥동학을 조명하는 사업, 그리고 장흥동학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는 일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인 요청이며, 장흥역사의 중요한 핵이 아닐 수 없다.

행정당국의 장흥동학의 성역화 사업 추진에 대한 분명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행정당국이 지금처럼 계속 방가하고 외면하는 한 장흥동학의 정체성은 정립은 어렵다. 담당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아주 비근한 사례의 하나로, 이번 동학사료집 발간에 대해 고작 7백만원이 지원됐다는 사실이다. 언제인가 본란에서 지적했듯이, 지난해 김모씨라는 한 개인의 잡문집 발간에 2천만원이 지원되기도 했다. 이를 동학사료집 발간 지원비와 비교한다면, 군 당국이나 관련 공무원의 장흥동학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도를 잘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이제 <우선봉일기>의 완전 번역이 추진되어야 한다. 그리고 <좌선봉일기>의 번역도 추진, <우선봉일기>와 합본 발간을 추진하는 일을 올해라도 당장 추진할 일이다. 그리고 장흥동학 성역화사업에 대해 군당국의 확고한 의지가 선행되고, 이와 함께 차근차근, 연차적인 계속사업으로 추진, 장흥동학의 정체성을 시급히 확립해야 한다. 역사는 오늘에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을 때 진정한, 보다 가치 있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제399호 2007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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