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형,내 토굴 앞 바다에서 캔 바지락을 조금 보내드립니다. 부담스러워하지 마시고 맛있게 삶아 국을 내어 드십시오. 아마, 다른 어떤 바다에서 난 것보다 더 향기롭고 고소할 것입니다.

저의 토굴로 찾아온 사람들이 말합니다.“선생님에게는 세월이 거꾸로 흐르는 듯싶습니다. 얼굴이 날이 갈수록 희어지고 눈이 맑아지십니다.”

물론, 저를 기분좋게 하려는 덕담일 터이지만, 그러할지라도, 서울에서 이리로 이사온 이후, 비쩍 말라 있던 제 체중은 63㎏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 제가 살고 있는 장흥 안양 율산마을 앞의 오염되지 않은 여닫이 바다에서 나는 석화 무침과 바지락과 붕장어 곰국으로 끓인 시래깃국을 상식하고, 가끔 이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회를 먹고 앞산에서 딴 차를 마시고 마음을 비우고 사는 까닭일 터입니다.

ㄹ형, 귀하고 맛있는 것을 혼자서만 감추어놓고 먹으면 입술이 부르틀 뿐 아니라 살이 내린다고, 어린 시절 어른들이 말했는데, 저는 내내 그것을 굳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저는 ㄹ형에게 율산 마을 앞 갯벌에서 나는 바지락을 선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을 공동양식장을 일 년에 한 차례씩 개장하는데, 저의 늙은 아내는 거기에서 6일 동안 힘들게 캔 것들을 자식들과 친지들에게 고루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아내가 고맙습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챙기듯, 고생은 아내가 하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남편인 제가 다 받게 되었습니다.

ㄹ형, 지도에서 보면 장흥 율산 마을은 ㄷ자 모양의 득량만 서북쪽 연안에 위치해 있는데, 그 앞 여닫이 드넓은 갯벌은 생금(生金)밭이라고 소문나 있습니다. 자궁 모양의 득량만 바다의 갯벌은 유달리 차지고 무르고 깊어 플랑크톤이 많으므로, 큰 고기들은 이리로 알을 낳으러 들어오곤 합니다. 여기에서 잡힌 모든 해산물들은 다 맛있습니다.

가뜩이나 마을 뒤에는 드높은 사자산 엉덩이 부분과 삼비산 자락(일명 일림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그 아래에는 2층으로 된 특이한 1급수의 청록색 저수지 둘이 있는데, 그곳에서 흘러나와 농토를 적신 물이 여닫이 연안 바지락밭으로 들어옵니다.

바지락은 청정의 담수가 잘 공급되어야 오동통하게 살찌고 고소하고 진한 단맛이 납니다. 율산 마을 바지락밭만큼 담수가 잘 공급되는 곳은 이 나라 어디에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마을의 한 가구에는 40평쯤의 바지락 밭이 배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1400평의 논하고 바꾸어주지 않습니다. 모 심을 일도 없고, 농약을 치거나 거름을 하거나 밭갈이할 일도 없고 누가 도둑질해갈 우려도 없습니다. 아무 때든지 용돈이 궁하면 바구니와 호미만 들고 나가 캐다가 시장에 팔면 되므로 그것을 대학 가르치는 밭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또 마을 공동 바지락 양식장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한 해에 2억원 이상이 수확됩니다. 또 그 아래쪽의 키조개 양식장 피조개 새조개 양식장 임대 수익이 아주 짭짤하여 마을 어촌계의 재정은 근동에서 제일 넉넉합니다.

웰빙 세상이 되면서 우리 마을의 바지락은 시장으로 출하될 새가 없습니다. 외지 사람들의 주문을 받아 팔기에도 부족합니다. 장흥 버스터미널 근처의 수산물 가게에는 외부의 바지락이 스며들어와 율산 바지락 행세를 하고 있을 지경입니다.

이 바지락 국을 내어 수제비를 해먹어도 좋고, 술 마신 이튿날 보얗게 국물을 내어 마셔도 좋을 것입니다. 고단백 식품인데다가 천연 이뇨제가 들어 있는 이것은 산후조리에도 좋다고 합니다. 많지 않은 것이지만 고향 친구의 향기와 맛이라 여기시고 달게 드시기 바랍니다.

ㄹ형, 이제 그것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기는 합니다만, 나는 고소하고 시원한 바지락국을 마실 때마다 ‘새만금 제방 공사는 참으로 미친 짓이다.’하고 생각하면서 슬퍼합니다.
200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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