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이전의 여성 항일운동가 이소사는 누구인가

◆…1999년에 이배용씨가 펴낸 <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청년사 간)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저자 이씨는 ‘한국의 잔다르크’라는 제목으로 장흥 여성 동학교도 이소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중략 …현존자료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여자동학군으로 이소사(李召史-소사란 당시 일반 평민 중 결혼한 부인을 지칭하는 용어이다)란 여성뿐이었다. 이소사는 18945년 3월 동학군이 장흥부를 공략할 때 22세의 젊은 여인으로 두령이 되어 선두에서 동학농민군을 총지휘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소사는 일찍이 꿈에, 天神으로부터고정(古鋌)을 받은 여자도인으로 동학교도들 사이에서는 신성한 여인으로 숭앙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신녀인 이소사조차 관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비록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동학농민군이 정무에 건의한 폐정개혁안 중 과부의 재가를 허락하도록 요구한 항목은 동학농민군의 자발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이소사와 같은 여성의 활역이 반영된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소사는 가히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할만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하략…”

장흥의 여성 동학교도, 최근 장흥동학농민혁명운동 기념사업회에 의해 발간된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집>에 이소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 돼 있다. 이른바 이두황의 ‘우선봉일기’가 그렇고, 위의환씨가 작성한 이소사에 대한 기록들이 그것이다.

의환씨의 허락을 얻어 이소사와 관련된 우선봉 일기와 위의환씨의 글을 발췌, 2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주◆


■우선봉일기의 이소사 기록


【1895년 1월 1일조】

【南小四郞에게 보낸 답신】

▶첫째, 음력 갑오년 12월 27일 오전 8시에 보낸 서신을 12월 30일 亥時(밤 10시)에 수령하였습니다.

▶둘째, 거괴 체포자(선봉일기 1월 1일조에 이소사(李召史)로 밝혀진 여동학이 처음 나오지만 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南小四郞이 우선봉으로 여동학 압송을 지시한 서신을 보낸 날짜가 12월 27일 오전 8시이므로 이소사는 이미 12월 26일 이전에 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농민군이 체포되면 당일 또는 2~3일 내로 처형되었는데, 1월 1일 현재 5일 이상 처형을 하지 않고 그것도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물만 압송하는 나주압송 대상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아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이소사의 체포는 이미 12월27일 오전 8시 이전에 있었지만 이두황이 일본군 19대대장 南小四郞에게 이소사의 체포사실을 보고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나주로 호송이 가능하냐고 했는데, 이 역시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民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는 민인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의 몸은 소모관 백낙중(白樂中)을 경유하여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되어 있으며, 교령을 받았을 때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모양입니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女東學)을 본부로 압송하겠습니다.

【李召史 나주이송】

▶“양호도순무우선봉(兩湖都巡撫右先鋒)은 장흥에서 체포한 죄인 여동학 1명을 호송하는 일에 대해 영을 내리니 장흥부 민병에게 나주로 압송하도록 하였는바, 경유하는 각처는 각별히 호송하는데, 혹 막히는 불편이 생기지 않도록 헤아려 주어라.”

【1월 3일조】

【양영(兩營)에 보낸 첩보】

▶“장흥 민인(民人)들이 체포한 여동학(이소사)이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내고 있습니다. 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인 바로 금일 초하루에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대대로 보냈습니다. 장흥수성군과 각면 민인과 더불어 벽사민인들이 체포하여 받친 동학도 합 50명을 끝맺음을 한 후 성명을 성책하여 첩보하여 보냅니다.”

【1월 4일조】

【南小四郞에게 보낸 답신(앞의 南小四郞 서신과 뒤에 나오는 南小四郞의 서신에 대한 답변이다.】

▶“귀력(貴曆:양력)으로 1월 27일 8시에 서신을 보내시고, 폐력(弊曆:음력) 정월 4일 오전 10시에 수령하였습니다. 소모관 백낙중을 신속하게 포박하여 나주로 보내라는 교령을 받았을 때는 이미 정월 초 2일 영암에서 귀국 병사 2인이 체포하여가 지금은 장흥에 있지 않습니다. 청산 보은의 적의 동정은 이미 반듯하게 되었다고 알려주는 교령을 받아 축하드리며 기뻐합니다. 여동학 이소사(李召史)의 시중하는 사람을 급히 기동시켜 나주로 보내 그 처자의 간병을 하게 하라는 교령을 받들기 위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40리나 되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조금 늦어져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는 즉시 기동시켜 보내겠으니 헤아려 주십시오.”

▶일본인과 통사(通詞-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에 딸린 이원(吏員)으로 통역(通譯)에 종사하는 역관)가 동학도 성명성책의 결과를 등사하여 갔다.(내용으로 보아 일본군이 아닌 일본 신문기자가 장흥의 동학군 토벌을 취재하기 위해 통역을 대동하고 자료를 수집한 것 같다.

【南小四郞이 보낸 서신】(南小四郞이 보낸 서신 앞의 南小四郞의 서신은 보낸 날짜와 수령한 날짜가 있는데, 이 서신은 발신과 수신을 알 수 없지만 전후 사정을 검토하여 보면 이 서신이 작성된 날짜가 앞서 도착한 서신보다 빠른 것 같다. 이는 이소사를 장흥에서 1월 1일 나주로 압송했기 때문에 1월 2일 도착했을 것이기에 금일 여동학 수령이라 했고, 앞의 서신에서 “(동학도를) 금일 4일까지 처형하지 않고”를 보아 4일 작성한 서신이 급히 장흥으로 전달된 것 같다.)

▶첫째, 병정 100명이 금일 나주 도착했다. 그 밀보(密報)를 역시 수령했다.

▶둘째, 여동학 금일 오후 수령.

▶셋째, 소모관 백낙중을 빨리 잡아 나주로 급송하라.

▶넷째, 여동학 이소사의 시중하는 사람을 급히 나주로 보내 그 처자를 간병하게 하라.(339쪽)

【1월 7일조】【南小四郞에게 보낸 서신】

▶“공경하오며, 귀력(貴曆)으로 1월 31일에 서신을 보내, 폐력(弊曆)으로 1월 7일 오전 11시에 삼가 수령하였습니다. 각 지방 동학도 많이 진정되는 양태라고 교령을 주어 감사드립니다. ‘귀 부대가 이 지역을 떠나 나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교령을 삼가 명령으로 받아 나갔습니다. 여동학 이소사(李召史)의 시중하는 사람 김양문(金良文)(이 문구의 원문은 “女東學李召史之夫金良文”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李召史之夫”를 이소사의 남편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관군의 기록인 “양호초벌등록(兩湖招討謄錄)”에는 이소사가 허내원(許乃元)의 妻로 나오고, 허내원은 全州의 접주이기에 “李召史之夫”를 번역하면서 애를 먹었다. 이 관계는 좀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기에 본 번역에서는 召史는 성 아래에 붙이어 과부(寡婦)를 점잖게 일컫는 말로 金一之의 처를 文召史라 했고, 남편이 죽었다고 거짓말 한 李仁煥의 처도 劉召史라고 하여 과부로 보고 번역한다. 李召史를 과부로 본다면 살아 있는 남편이 있을 수 없어 김양문(金良文)은 이소사의 남편이 아니라고 보고 번역했다. 일기를 통해 김양문은 이곳에 한 번 나온 인물이기에 어떤 인물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夫는 대체적으로 지아비부로 통하지만 字典을 살펴보면 시중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에 앞에 나온 李召史 기록에서도 “李召史之夫”를 모두 이소사를 시중하는 사람으로 일단 번역하였고 추후 허내원과 김양문 이소사의 관계를 조사하여 이 문제는 가가닥을 잡아 나갈 예정임)을 그 동안 4번이나 찾았고, 지금 (병간에) 재능 있는 사람을 부르고 있으니 이에 기동하여 보내겠습니다.

■당시 일본신문에 보도된 이소사 최동린의 기록

전국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동학에 입도했던 신도인가 아니면 단지 종교의 외피를 둘러쓴 혁명세력인가 하는 논란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장흥에서는 대흥면과 제도면이 갑오년과 을미년의 그 처참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1897년부터 동학조직을 복원하는 것을 보아서 동학교도가 중심이 되어 혁명을 이끌었던 것은 이 고장에서는 사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시대상황으로 보아 여성이 혁명대열에 직접 참여하여 전투를 지휘한다거나 어린 소년이 물심부름이나 뒤따라 다니면서 구경한 것이 아니라 선두에 서서 혁명전사들을 고무시키고 오히려 전투를 지휘했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먼저 13세 신동으로 최동린(崔東麟) 또는 최동(崔童)으로 불리는 당시 이 어린 소년은 철부지로 단순 가담자가 아니다. 천도교 장흥교구에서 보관하고 있는 갑오동학혁명혈사에는 “氏는 장흥군 대흥면(현 대덕) 연지리에서 生하여 13세 소아로 衆을 지휘하여 본군 남문밖 석대전에서 수많은 衆을 총지휘하다가 전사하다”로 기록되어 있다. 상대편 진압군의 기록인 동학난기록(東學亂記錄)하권에는 더더욱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1894년 12월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12월 28일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13세 소년을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해 갔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린 소년에게 반역의 죄를 씌워 처형을 한 것으로 보아 보통내기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마 전국 최연소자로 처형당했을 것이다. 그것도 중범죄만 다루는 나주에서 일본군에게 처형당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에 발견된 당시 일본신문기사가 영인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23권 183쪽에 이소사는 여동학으로 최동린은 어린동학으로 제목을 뽑아 이소사 기사에 이어 최동린의 기사가 함께 나오는데, 먼저 최동린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어린동학. 동도(東徒) 중에는 동자(童子) 한 사람이 있는데, 성은 崔라고 했다. 동학 신도들은 그를 칭하여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최동자(崔童子)라 하여 그 순진무구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우롱하였다. 동학도의 인민을 선동하는 것은 매번 이와 같다.”

이 일본신문 기사내용은 일본인의 시각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본 것으로 마치 순진한 어린애를 전장에서 선동꾼으로 이용한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

장흥동학농민혁명에서 어린 소년은 비단 최동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동린과 같은 대흥면 연지리 출신인 김유선(金有善)은 15세의 나이로 참전하여 생환하였다. 약산면 해동리의 박백환(朴白煥)도 당시 15세의 나이로 참전하여 생환하였으며, 500~600명의 동학농민군을 구원한 소년 사공 윤성도(尹成道)도 당시 16세였다. 무엇이 이 어린 소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을까? 당시의 시대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성 동학군(이소사)이 장흥전투에 등장하여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여 당시 일본신문에 보도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1990년도부터 등장한다. 1990년 1월에 발간한 <장흥군지>는 1975년에 발간한 <장흥군향토지>를 그대로 차용하면서 오직 새로운 기사로 전봉준의 격문과 여동학 이소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이때 이소사(李召史)란 여인이 앞장서서 싸워 동학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큰 전과를 거두었다고 당시 일본의 朝日新聞에 기록되어 있으나 여타 동학관계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확인된다면 3.1운동 때의 유관순처럼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로 부상될 것이다.”

또한 이 고장출신 소설가 송기숙은 1990년 5월 남풍출판사에서 발행한 <역사와 현장> 1권에서 “장흥지역 동학농민전쟁 관계구전조사” 181~182에서 “당시 ‘일본 조일신문’에 장흥에서 이소사라는 여자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짤막하게 보도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여러 사람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소사(召史)란 과부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니, 그가 이가라면 이방언 장군의 집안 여자가 아닐까 싶으나 그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여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일 것이다.”라고 마무리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22권 499쪽과 23권 183쪽에 영인되어 있는 이소사의 일본신문 기사는 다음과 같다.(일본신문 기사는 마이크로필름을 복사한 것이라 육안으로 쉽게 판독하기 어렵지만 확대하여 이소사와 최동린의 일본신문 기사번역을 목포문화원과 장흥고 일어 선생님에게 의뢰했는데, 고문(古文)이어서 번역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번역을 위의 최동린 기사와 함께 필자가 종합한 내용이다.)


-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李召史)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여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神女)가 되었다. 그러나 장흥전투의 패배로 관군에 체포되어 지금은 장흥의 철장 안에 있다고 한다. 어쩌면 작년의 신동(神童)( 위의 13세 동학군 최동린을 말한다.)의 일과 같은 것일까?(22권 499쪽)


- 여동학. 장흥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 명의 여자가 있어 추천되어 수령(首領)이 되었다. 우리 병사가 잡아서 심문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다. 동학도가 귀신을 애기하고 신(神)을 말하는 것을 이용하여 천사(天使) 혹은 천녀(天女)라 칭하여 그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였다.(23권 183쪽)

우선봉일기 음력 1895년 1월 1일조에 이소사가 체포된 사실이 처음 등장하지만 일기의 내용으로 보아 南小四郞이 이두황에게 여동학 압송을 지시한 서신을 보낸 날짜가 음력 12월 27일 오전 8시이므로 이소사는 이미 12월 27일 이전에 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南小四郞은 지휘서신을 통해 나주에서 이두황에게 거괴 체포자 나주로 압송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이두황이 답하기를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民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는 민인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의 몸은 소모관 백낙중(白樂中)을 경유하여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되어 있으며, 교령을 받았을 때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모양입니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女東學)을 본부로 압송하겠습니다.”고 보고했는데, 갑자기 1월 1일 오후에는 나주로 압송을 결정하고 이두황은 다음과 같이 장흥에서 나주로 가는 길목에 지시를 내린다.

“양호도순무우선봉(兩湖都巡撫右先鋒)은 장흥에서 체포한 죄인 여동학 1명을 호송하는 일에 대해 令을 내리니 장흥부 민병에게 나주로 압송하도록 하였는바, 경유하는 각처는 각별히 호송하는데 혹 막히는 불편이 생기지 않도록 헤아려 주어라.” 1894년 12월 30일 亥時(밤 10시)에 남소사랑(南小四郞)의 지휘서신을 수령하여 1895년 1월 1일 오전에는 지금 상태로는 보내기 어렵다고 답신을 하였다가 오후에 이소사를 나주로 압송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이소사가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내고 있습니다. 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인 바로 금일 초하루에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대대로 보냈습니다.”라는 이두황이 1월 3일자에 순무영(巡撫營)으로 보낸 첩보에 의해 확인할 수 있듯이 갑자기 소생하였기 때문이다.

대부분 농민군이 체포되면 당일 또는 2~3일 내로 처형되었는데, 늦어도 1894년 12월 26일에 체포된 이소사가 1월 1일 현재까지 5일 이상 처형을 당하지 않고 그것도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물만 압송하는 나주압송 대상으로 분류된 것으로 보아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이소사의 체포는 이미 12월26일 이전에 있었지만 이두황이 일본군 19대대장 南小四郞에게 이소사의 체포사실을 보고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南小四郞은 12월 27일 아침에 이두황에게 지휘서신을 보내 나주압송을 지시한다. 南小四郞이 장흥에 주재하지 않고 나주에 있을 때도 南小四郞은 장흥의 상황을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군은 전보(電報)라는 통신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지 일본군을 통해 장흥의 급보가 南小四郞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1월4일 일본인이 통역을 대동하고 동학도 성명성책의 결과를 등사하여 갔다는 일기내용으로 보아 일본군이 아닌 일본 신문기자가 장흥의 동학군 토벌을 취재하기 위해 통역을 대동하고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1월 2일경 이소사를 인수한 일본군은 이소사를 곧장 처형하지 않고 조사를 하기 위해 장흥에서 소모관에게 몹시 맞아 몸이 상한 이소사를 병간호시키기 위해 두 차례나 장흥으로 “여동학 이소사의 시중하는 사람을 급히 나주로 보내 간병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두황의 답변에서 단지 이소사가 살고 있는 위치를 어림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장흥읍에서 40리 되는 거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원문은 “李召史之夫”로 되어 있어 있는데 눈으로 보면 번역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어 보이지만 아주 해석하기 난처한 문구이다. 필자가 번역하기를 1월 4일자 답변에서 “여동학 이소사(李召史)의 시중하는 사람을 급히 기동시켜 나주로 보내 그 처자의 간병을 하게 하라는 교령을 받들기 위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40리나 되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라고 했으나 조금 늦어져 기다리고 있으니 오는 즉시 기동시켜 보내겠으니 헤아려 주십시오.” 그리고 1월 7일자 답변에서 “여동학 이소사(李召史)의 시중하는 사람 김양문(金良文)을 그 동안 4번이나 찾았고, 지금 (병간에) 재능 있는 사람을 부르고 있으니 이에 기동하여 보내겠습니다.”로 했다.

여기서 필자는 우선봉일기를 번역할 때 이소사를 시중드는 사람이라고 번역하였지만 南小四郞이 이두황에게 보낸 원문은 “李召史之夫”라고 되어 있다. 이두황이 보낸 답신의 원문은 “女東學李召史之夫金良文”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李召史之夫”를 이소사의 남편으로 해석할 것이냐, 시중드는 사람으로 해석할 것이냐에 대해 현재로서는 앞의 송기숙처럼 과부로 보고 해석한 것이다.(夫는 대체적으로 지아비부로 통하지만 字典을 살펴보면 시중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소사를 과부로 보는가?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이하 명예회복심의위)”에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이하 사료총서)”를 중심으로 편찬한 “유족등록 신청참고자료”에 이소사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출처가 나온다. 사료총서 6권 8쪽에는 이소사가 허내원(許乃元)의 妻로 나오지만 필자는 아직 이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고, 許乃元은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단지 “全州에서 徐永道와 許乃元이 기병하니 그 수 수만에 달하였다고”라는 기사는 확인했지만, 사료총서 28권 239쪽에 나오는 전주의 許乃元과 사료총서 29권 335쪽에 나오는 전주의 許乃遠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이소사가 허내원의 처라면 “李召史之夫金良文”은 분명히 남편이 아니니 “이소사의 시중드는 김양문”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다. 이 관계는 좀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기에 본 번역에서는 召史는 성 아래에 붙이어 과부(寡婦)를 점잖게 일컫는 말을 차용하여 김일지(金一之)의 처를 문소사(文召史)라 했고, 남편이 죽었다고 거짓말 한 이인환(李仁煥)의 처도 유소사(劉召史)라고 우선봉일기에서는 기록하였다고 본다. 일기를 통해 김양문은 이곳에 한 번 나온 인물이고, 현재로써는 어떤 인물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에 추후 허내원, 김양문, 이소사의 관계를 조사하여 이 문제는 가닥을 잡아 나갈 예정이다. 필자도 송기숙처럼 李召史를 인천이씨로 추정하고 인천이씨 족보에서 갑오년 무렵의 인물 중에 허내원과 김양문이 이천이씨 집안의 사위로 기재되어 있는가? 이방언 장군의 증손에게 확인을 부탁했으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김재계가 일곱 살 먹던 해의 동학을 회상하는 “갑오년 동학이야기”에 나오는 시녀(侍女)와도 연관성이 있는지 더 심층적인 연구를 하여 볼 필요가 있다.

- 또 고읍면(현 관산읍) 송현리 등지에서는 시녀(侍女)가 나고, 대선생이 나고 해서 뭇사람으로 하여금 개수정 돌바위밑에 용천검이 있고, 갑옷이 있으니 파라고 해서 날마다 사람이 구름 모인듯하였다.

“장흥동학농민혁명의 10대불가사의”가 있다고 했듯이 필자도 이소사에 대해서는 불가사의이다. 아무튼 이런 불가사의 한 미모의 22세 인물이 장흥전투에 말을 타고 나타나 전투를 지휘한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병간호까지 시켜가며 일단은 목숨을 유지시켜 조사를 하려고 했다는 것과 일본신문에서 조차도 분명히 장흥의 여동학 이소사로 보도를 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소사라는 인물은 앞으로 장흥동학농민혁명사에서 자세한 관계를 밝혀내야할 숙제이며, 유관순열사의 선배로 여성운동의 연구자로 자리매김 시켜야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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