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민초들의 눈물위에 새워진 위대한 유산 만리장성


북경에서의 이틀째다. 오늘의 여정은 지금성과 용경협이다. 오후 늦게 사우나와 민속경연 구경도 예정돼 있다

오전 일찍이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교통이 편리해 ‘사통팔달’이란 뜻에서 유래된 ‘팔달령’에 있는 만리장성으로 이동한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만리장선(萬里長城) 중 이곳 팔당령의 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는 만리장성의 대표적인 구간으로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드넓은 주차장에는 얼추 100여 대의 대형 관광버스들과 수십 대의 승용차들이 주차돼 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으로 오른다. 옛날에는 걸어서 올랐거나, 혹시 우마차로나 올랐을 테지만, 지금은 기계로 오른다. 오르고 내려오는 케이불카는 30여대쯤 보인다.



이 거대한 성벽은 지금 ‘중국의 상징’으로 ‘중국인의 자긍심’이 되어 세계적인 광광지로 자리잡았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서 필요했을, 또는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기능을 했을 만리장성은 이제 세계 7대 건축물, 또는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세계적인 유적지로 흘러간 역사의 자취로 남아 세계인들의 관광자원이 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엔 이 성을 축조할 때 동원됐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이 깔려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팔당령 정상에 드디어 다다른다. 이곳의 해발고도는 1015m. 비교적 험준한 산세로 이루어져 있고 그 험한 산세를 이용해 만든 평균 높이 6~7m 정도 되는 성곽 위로 말 5마리는 이



끄는 마차도 거뜬하게 지나치게 만들었다는 성곽길이 트여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은 정작 마차는 고사하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서서히 걷기 힘들 만큼 수많은 인파로 뒤덮여 있다.

모택동이 한때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사내 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比好漢)’고 했다는데, 모택동의 그 말 한 마디의 영향 때문일까. 천안문광장에 모여든 중국인 보다 더 많은 중국인들이 때지어 몰려 있다. 또 중국인들이 모택동이 친필로 썼다는 그 ‘호한비(好漢碑) 앞에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도 보이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앞에서 팔고 있는 ‘호한증(好漢證)’도 사 가기도 한다. ‘만리장성에 올랐으니, 당신은 사내대장부입니다’라는 증명서를 판다니, 중국인들의 그 기발한 착상이 놀랍다.

북8루라는 최정상의 망루(돈대)로 오르는 길은 경사도가 4,50도는 될 듯 가파르고, 바람도 세차 단숨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가까스로 정상의 망루에 다다른다. 눈 아래 만리장성이 펼져져 있다. 뱀이 좌우로 똬리를 틀듯 끝간 데 없이 이어지는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저 멀리까지 뻗어있는 장성을 바라본다.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진 성곽의 선이 한 폭의 동양화이다.

구불구불 끝없이 뻗어나 있는 장성의 기세가 자못 웅장하고 화려하다. 아니, 장성의 그 장대함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날씨가 흐려 카메라에는 원경까지의 정경이 잡혀들지 않는다.

팔달령 장성의 성벽은 남과 북으로 각각 산세를 따라 뻗어 올라가 있는데 남북 두 봉우리에 각각 4개의 망루가 우뚝 솟아 있다. 또 장성은 망루(돈대)와 성곽으로 연결돼 있고, 망루는 보통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망루와 망루사이는 대략 120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다.

팔당령 장성에는 매년 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동쪽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 자위관(嘉峪關)까지 이르는 만리장성은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을 쌓게 된 배경을 중국 한족(漢族)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자랑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진시황의 폭정에 반란의 깃발을 내건 한고조 유방의 사연이 깃든 곳이기도 하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죽은 남편을 찾아 떠난 '맹강녀'의 전설이 깃들어 있듯이 수 많은 백성들의 원혼이 잠든 곳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성은 중국 고대의 중요한 군사 시설로, 기원전 7세기 춘추시대 제(齊)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에는 연(燕)·조(趙)·위(魏)·초(楚)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기원전 221년 중국 진나라 때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BC 214년에 그때까지 연 ·조 등이 구축했던 성을 증축 ·개축, 10년을 거쳐 방대한 장성이 구축 되었다.

그 후 역대 왕조들이 방어 수요에 따라 개수했는데, 특히 명나라 때는 약 200여년 간 장성을 18차나 수축해 장성이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에서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까지 수많은 산을 넘고 초지를 건너고 사막을 경유하면서 길이가 6,7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현재의 장성이 되었다. 진나라 때 건설된 만리장성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지금 보존되고 있는 것은 주로 명나라 때 지어진 것이다.

유엔은 지난 1987년에 이 만리장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고, 중국정부는 법으로 개발을 제한하고 있다. 북경 문화유산관리국에 의하면, “훼손되지 않은 장성의 성벽은 전체 약 20%정도이며 공개되고 있는 팔달령 지역은 거의 모든 벽돌에 사람들의 이름과 낙서로 채워져 있다”고 말했다.


‘수많은 백성의 눈물’ 위에 만들어진 ‘위대한 역사적 유물인 만리장성- 이것은 분명이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천안문 광장 역시 마찬가지다. 천안문 사태는 중국인들의 민주화의 열기를 탱크를 동원해 수많은 민중을 짓밟아버린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1당 체제를 얻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민주화 사건으로 인해 오늘날 천안문 광장은 세계인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또 진시황제의 궁묘기 있는 시안에서 발굴된 병마용갱 유물 역시 한해 2백만명이 찾는 세계적인 유적의 명소로 급부상되고 있다. 1978년 병마용갱 발굴 현장을 방문한 바 있던 시라크 프랑스 총리는 “피라미드를 보지 않으면 이집트를 다녀왔다고 할 수 없듯이, 시안의 병마용을 보지 않으면 중국에 다녀갔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시안의 병마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까지 8000여개의 흙으로 빚은 실물크기의 병사, 장군, 말 등이 발견됐다. 이 지하 병마용에는 70만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엄청난 지하유물 역시 시황제와 관련있음은 물론이다.

물론 진시황제의 자하궁묘 발굴은 시작도 안된 상태이다. 만리장성도 그렇거니와, 중국역사상 폭군 중의 폭군이었던 시황제가 오늘날 이렇듯 세계적인 문화보고의 제공자가 되고 있는 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래서일까. 만리장성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그 거대한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과연 그 장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까. 황토를 틀에 넣어 햇빛에 건조시켜 만들었다는 수많은 흙벽돌 하나하나에는 그 많은 원혼들의 피와 한이 담겨있을 것이 아닌가.

일행들이 장성 입구 휴게소 같은 곳에 모였다.

“대단하지? 저 엄청난 중국인의 저력말야?” 누군가의 말에, 또 한 사람이 “황제의 영광이니 어쩌니 하지만, 그놈들은 이곳에 흙 한 줌 나르지 않았어. 다 힘없고 불쌍한 민초들만 끌려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역하다, 죽어갔겠지. 맹강녀라는 전설도 있잖아?”

만리장성과 맹강녀. 장성을 쌓은 중국인들의 저력을, 황제들의 업적을 찬양하지만, 장성에 쌓인 돌더미 하나하나에 수천수만의 민초들의 한과 눈물 담겨있으리라. 사가들이 말하길, 일만 오 천리의 장성을 쌓다가 죽어간 이들이 백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죽어간 사람들의 한과 눈물로, 그리고 그들의 죽음 위에 세워진 성이 바로 장성이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흔히 정의 깊은 인연에 대한 의미로 알려진 것과 달리, 슬픈 내용의 전설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이제 갓 혼례를 올린 여인이 남편을 장성 쌓는 곳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집 앞을 지나던 농부를 유혹하여 초야를 치렀고, 하룻밤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 농부는 다음날 아침, 여인의 남편 대신 장성 노역장으로 잡혀가 평생을 그곳에서 일만하다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장성 쌓기 이면에 담겨진 또 하나의 대표적인 비통한 얘기가, 바로 '맹강녀의 슬픈 전설'이다.

옛 제(齊)나라에 맹강녀라는 여인이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은 만리장성 축조에 징집되었다. 이후로 한참을 기다린 그녀는 남편이 3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집을 떠나 만리장성 축조 현장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이 일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맹강녀는 그 앞에서 한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만리장성의 한쪽 성벽이 무너지며 수많은 백골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실화를 근거로 한 이 전설에 나오는 맹강녀의 묘는 현재 중국 하북성 산해관 동쪽 7km 지점에 있고 그 옆에는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멀리 만리장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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