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마루서 본 어머니 마음

매일신문/2007년04월 03일/한준희(경명여고 교사)



선학동 포구를 뒤로 하고 진목 마을 표지판을 지나 길 너머 작은 고개를 향했다. 우연히 진목으로 들어가는 경운기를 만나 그 위에 올라타고 시골길을 가는 것도 흥취가 그만이었다. 고갯마루에 먼저 도착해서 걸어오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고개 너머 아래쪽에는 아담한 마을 전경이 한눈에 다가왔다. 거기가 바로 소설 '눈길'에서 대처로 나가는 아들을 배웅한 어머니가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곳이었다.
“그런디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그때 내가 뒷산 잿등에서 동네를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일 말이다. 그건 내가 갈 데가 없어 그랬던 건 아니란다.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됐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동네에선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참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 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고자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이청준의 '눈길' 중에서)

고갯길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라는 말보다 더 정겨우면서도 가슴 아린 말이 있을까? 대처로 나가서 공부하는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미 팔려버린 집에서 밥을 지어 먹이며 하룻밤을 재우고 새벽에 다시 대처로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을 과연 이 땅의 아들들은 알고 있을까? 마음으로 읽으면 누구나 가슴이 찡한 소설이 바로 '눈길'이다.

마을로 들어섰다.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지도에서도 찾기 어려운 작은 마을은 멀리 경상도에서 무리지어 찾아간 우리들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부산해진 느낌이었다. ‘경상도에서 왔다네. 청주니(청준이)가 유명하긴 하나 보네. 볼끼도 없는디.’ 마을 입구 커다란 나무 아래 정자에 앉아 쉬고 있던 노인들도 몇 마디씩 거들면서 신기한 듯 우리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조용하던 마을은 갑자기 개 짓는 소리,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로 요란했다.

‘갈아 만든 배’ 한 박스를 들고 이청준 생가로 들어섰다. 초라한 대문, 무너질 듯한 작은 시골집, 좁은 마당, 마당 끝의 작은 텃밭, 텃밭 가장자리를 차지한 치자나무, 모든 것이 소설 속 그대로였다. 다만 지붕은 초가가 아니라 슬레이트로 바뀌어져 있었다. 현재 거기에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께서 반갑게 우릴 맞았다. 원래 이청준의 집은 부자라고 했다. 지붕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기와집이 원래 이청준 집안이 살았던 곳이라고도 했다. 지금의 집 근처의 땅이 대부분 이청준 집안의 땅이었는데 형님이 술과 도박에 빠져 거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단다. 이청준이 가슴에 안은 가난이란 한, 고향에 대한 애증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고향이 남긴 아픈 시간들이 싫어 거의 고향을 찾지 않았던 이청준, 그러나 사실 그의 소설은 고향이 없었다면 창조될 수 없었던 말 그대로 고향의 이야기였다. 작가 스스로도 자기 문학의 고향은 장흥이자 어머니라고 했다. 무척이나 따랐던 작은형이 죽은 후 작은형이 살았던 방 구석에 쌓여 있었던 책더미,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형의 소설 습작물들, 거기에 이청준 소설의 시작이 있었다. 이청준의 생가에는 그런 아픈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시원한 재래식 수도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며 '눈길'의 대목대목을 되새기고 있었다. 돌담에 핀 작은 들꽃을 향해 몇 번이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청준씨는 천재였재. 책보를 가지고 학교를 가지 않았당께.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선생 말을 듣고 있으면 다 외웠으니께. 법대를 가지 않은 것이 가장 아쉽당께. 그랬다면 지금쯤 나라를 이끌 사람이 되었을낀데.”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뒤로 하고 진목을 떠났다.

☞ 이청준의 '눈길'

'눈길'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지닌 주인공이 고향에서의 체험을 통해 인간적 화해에 도달하는 소설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조망하기보다는 현실에서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청준 문학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소설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전통적인 ‘효(孝)’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물질적 가치에 젖어 있는 이기적인 자식과 그 자식에 대한 노모의 사랑이 대조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눈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쓰라린 추억과 몰락해 버린 집안과 스스로 자수성가해야만 하는 운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있어서 ‘눈길’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상징물로서,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혹독한 시련이면서도 따스한 자식에 대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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