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와 관조 - 한국의 자연미, 판소리 보탠 ‘예술 영화’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영원한 사랑으로 승화

거장 임권택 감독(71)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마침내 장흥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남도사람' 중 '서편제'(1976), '소리의 빛'(1978), '선학동 나그네'(1979)의 세 단편 중에서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세 단편 모두 소리꾼 누이를 찾아 헤매는 남자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 '서편제'는 소설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천년학’은 '선학동 나그네'를 토대로 하고 있다.

사실 '선학동 나그네'는 ‘서편제’ 때에 찍으려 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원작소설의 마지막 대목, 즉 동호와 송화가 두 마리의 학이 되어 산천을 누비는 장면과 소설 속 배경인 바닷물이 드나드는 선학동을 당시 컴퓨터그래픽영상기술( CG 기술)로는 구현하기 어려워 이제야 영화화된 것이다.

따라서 '천년학'의 서편제의 속편 격에 속해 유사점이 많다. 이청준의 소설 '남도사람'이 원작이고, 한국의 고유한 판소리가 등장하며, 또 동호(조재현)와 송화(오정해)가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임권택 감독이 제작 초기부터 밝혔듯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이 아니며, '서편제'의 아류도 아니다. 우선 주제부터가 다르다. '서편제'가 소리의 절정을 쫓기 위한 소리꾼들의 처절한 한과 치열한 예술혼을 그렸다면, 천년학은 남녀의 진하고도 절절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그렸다.

임감독은 "학이 날갯짓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듯 소리로 승화된 영원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평생의 첫 멜로 영화"라고 했다. 이처럼 이 영화는 동호와 송화의 애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어, 임감독의 표현대로 임권택 감독 최초의 본격 ‘러브스토리’라 할만하다.

영화는 아버지 유봉(임진택)과 함께 유년시절 남매가 살았던 곳이지만, 이제는 쇠락한 선학동 주막을 동호(조재현)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동호는 옛 친구인 주인 용택(유승룡)과 술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회상한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소리꾼 양아버지 유봉에게 맡겨져 함께 남매처럼 자란 송화(오정해)와 동호. 한 사람은 소리를 하고, 또 한 사람은 북을 치면서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까지 품지만, '남매'라는 관계가 두 사람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결국 동호는 아버지가 대물림하려는 소리꾼의 삶을 거부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누라로 불러야 하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난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송화에게 흑심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송화는 그 아버지, 더구나 자신을 눈멀게 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아버지의 뜻을 이으려고 아버지 생전은 물론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혼신을 다한다.

동호는 군복무를 마치고 창극단에 취직해 전국을 떠돈다. 그 와중에 '눈먼 소리꾼'을 수소문해 송화와 잠깐씩 재회한다. 두 사람은 만남과 긴 이별을 반복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조금씩 멀어진다. 창극단의 여배우 단심(오승은)과 몸을 섞어 아들까지 낳은 상태인 동호의 현실이 송화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되는 이유도 된다.

선학동 주막을 떠나 앞 못 보는 눈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송화에게도 잠시나마 편안하게 지내는 춘시절이 찾아온다. 춘향가의 ‘춘향자탄’ 대목을 부르는 송화의 소리에 매료된 만석꾼 백사 영감의 첩으로 들어가게 된 것.

그곳에서 송화와 잠시 재회했던 동호는 훗날 “누나는 어쩌면 생애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고 할 만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지요”라며 그 당시를 회상한다.

동호는 그 후 백사 영감이 죽은 뒤 제주도로 내려가 무당이 살던 집에 세 들어 연명하고 있는 송화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호는 송화가 맘 편히 소리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집을 마련해주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로공사 현장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4년 뒤 많은 돈을 벌어 귀국한 동호는 진도에다 송화를 위해 번듯한 집을 짓는다. 방방마다 눈먼 송화를 위한 배려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송화를 사랑하는 동호의 마음이 애틋하게 드러난다.


'천년학'은 절실하고 평범한 우리 '인생살이'를 그리지만 이를 관조할 뿐이다. 꿈을 위해 노력하고, 좌절당하며,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또 죽음을 당하고, 한때의 찬란하던 명예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 쓸쓸히 종막을 고하기도 하는, 너무나 운명적이고 인간적인 우리의 '인생살이'를 무연히 들여다 볼뿐이다. 그리고 그 인생살이를 애잔한 판소리 가락과 가사로 연결지으며 소리의 영화로 승화시킨다. 해서 이 영화에서 삶의 이야기와 소리는 함께 어우러지며 예술이 된다. 그러므로 이 소리들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고 감정이며 메세지가 된다. 이 '느낌'이 때로 강렬하게 투사되며 심금을 울린다. 내밀하게 통곡으로 터져 나올 듯한 뜨거움이 목울대를 차고 오른곤 한다. 그러나 이 통곡은 가슴 속의 통곡으로 그치고 만다.

'서편제'에서 길이 기억되는 명장면은 유봉과 송화, 동호가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굴곡진 길을 걸어오던 그 6분여 동안의 롱테이크였다. ‘천년학’에서 명장면은 영화 후반부, 만석꾼 백사 영감의 애첩이 된 송화가 그 노인의 마지막을 지키면서 소리를 부르는 장면이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깨려는 꿈 꿈은 꾸어서 무엇을 할거나"(남도민요 흥타령)"

이 구슬픈 송화의 소리를 타고 창 밖에선 매화꽃잎이 바람에 함박눈처럼 남분분 흩날린다. 그리고 노인은 편안히 눈을 감는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매화가 속절없이 떨어지듯 떵떵거리며 호사를 부렸던 인간도 결국은 숨을 거둔다. 이 삶의 무상함에 대한 수천 마디의 언어와 비견할 수 없는 '운명적인 인생'의 철학을, 단지 몇 장의 그림과 소리로 절묘하게 압축해 내며 관객들을 숙연하게, 그리고 가슴 저리게 만든다.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연출로 인생의 의미를 환기시키기도 하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 영화의 힘이다. 그리고 '천년학'의 이 장면이야말로 그 '영화의 힘' 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영화 '천년학'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흐르고 있는 기저는 동호와 송화의 사랑이다. 어린 시절 그 주막집에서 이 '사랑' 때문에 동호는 용택과 싸우기도 한다. 그리고 동호가 집을 나간 것도 이 '사랑'을 지킬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군대 제대를 하기 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송화에게 선물할 탄피로 반지를 만들고, 제대 후 송화를 못 잊어 애끊는 마음으로 송화를 찾아다니는 동호의 간절한 모습은 안타깝다. 이것이 동호의 송화에 대한 사랑이고 그리움이다.

허나 이 사랑은 요즘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열정적이고 매번 몸으로 부딪치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내버리는 인스턴트식의 사랑이 아니다. 헤어져 있으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고 만나면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절망적인 사랑이다. 동호는 송화의 가슴 깊은 곳에, 송화는 동호의 가슴에 담겨져 있을 뿐, 좀처럼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은 사랑이다. 전설 같은, 신화 같은 사랑이다. 두 남녀간에 설렘과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마음 속 깊이 담아두고, 그 담아뒀던 사랑이 조금이라도 내비쳐질까 봐 조바심을 태울뿐이다.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 품은 그 질긴 연정마저도 소리로 승화시키는 그런 사랑이다.

송화는 백사 노인이 죽고 그 노인의 집에서 나서며, 값비싼 모든 패물들을 다 버리고 오직 동호가 준 탄피 만지만을 끼고 빈손으로 나온다. 그녀의 동호에 대한 사랑이 처음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동호가 제주도로 송화를 찾아가면서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송화가 혼자 사는 집에서 중동으로 떠나는 동호에게 라면을 끓여 준다. 그녀는 동호가 주었던 탄피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그 반지를 끼고 있네.” “네가 자꾸 닦아 주지 않으면 녹슨다고 해서.” 이때 그녀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다. 이 분위기는 두 사람이 연인으로서 확인에 다름아니다. 관객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육으로의 만남까지 상상할만 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이젠 그 연인으로서 이별해야 한다. 그러니 육으로 만남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뿐이다. 끝내 육으로 만남은 없다. 사랑은 때로 격정적이고 절절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끝까지 두꺼운 절제의 미학에 갇혀들고 만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갈대밭을 지나며, 힘에 버거운 길에서 동호가 송화를 껴안고 오르내리기도 하지만, 해서 간밤 연인으로 만남까지 확인했으므로 이런저런 연인으로서 조심스러운 대화도 이어질 법하지만, 그런 대화도 없다. 갈대밭에 누워 잠시 손이라고 잡아볼 수도 있으련만, 동호는 여전히 송화의 충실한 길 안내자일 뿐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 정상, 용눈이 오름에서 둘은 말없이 앉는다. 이내 송화가 춘향가 한 대목을 애절하게 부른다. 이는 송화의 동호에 대한 절절한 사랑고백이다.

"갈까부다 갈까부네 님을 따라서 갈까부다/천리라도 따라가고 만리라도 따라 나는 가지/하늘의 직녀성은 은하수가 막혔어도 일년 일도 보련마는/우리 님 계신 곳은 무삼 물이 막혔간디 이다지도 못오신가."

동호도 소리에 젖어들며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무릎에 손장단을 치며 소리에 빠져든다. 두사람의 사랑은 신분의 벽이 가로막은 이몽룡과 춘향의 사랑보다 더 모질고 애달프다.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니고, 분명히 사랑이지만 사랑이 될 수 없는 두 사람의 애절한 마음이 '춘향가'의 판소리로 표현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비통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며 애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일회적이고 육체적 위주의 세속적인 사랑에만 탐닉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사랑은 이런 것이라는 감독의 강한 메시지가 전해온다. 이러한 감독의 메시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환상 속에서나마 처음으로 마주앉아 소리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재현하지만, 그 환상 속에서도 부등켜 앉는 일 따위는 없다. 다만, 주막집 너머의 학이 비상하는 형국의 학산을 배경으로 바닷물이 차오르고, 그 바닷물에 그 학산의 그림자가 절묘하게 어우어지는 가운데, 두 마리의 학이 나타나 힘차게 비상하는 장면으로 이 영화의 막은 내린다. 두 마리의 학도 하늘높이 올라가 버린 후 학산과 바닷물에 비치는 또 하나의 학산, 땅위에 남은 두 개의 학산, 두 마리의 학의 모습이 긴 여운을 남긴다. 감독은 천년을 산다는 학처럼, 영원으로 날아오르는 사랑을, 지상에서도 두 마리의 학의 모습이 된 사랑을 꿈꾼 것이리라.

우리들에게 ‘이 정도는 돼야 사랑이 아니냐’고, '이런 사랑이야말로 영원한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무언의 강한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임김독은 이 영화에서, 한국적인 정취와 한의 미학, 참된 사랑의 의미를 담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이 정일성 촬영감독 특유의 유장한 영상미로 인해 시종일관 스크린을 압도한다. 또 심금을 울리는 판소리를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을 담으며 두 사람의 슬픈 사랑을 전해주며 눈을 아리게 하지만, 결코 감정선을 건드리며 울음을 폭발시키지는 않는다. 대신 많은 메시지를 전해준다. 삶을 관조하고, 사랑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을 판소리를 통해 승화시키고 절제적인 영상미학과 결부시켜 한 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화를 한 편의 꿈처럼 몽환적으로 만들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관통하는 정체는 관조와 절제의 미학이다. 이를 위해 감독은 섬세한 연출, 세밀하게 계산으로 만들어진 장치들을 곳곳에서 드러내며 한 편의 완성도 높은 아름다운 예술영화로 탄생시켰다.

잔잔히 흘러가는 이야기에도 절제가 숨어있다.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등장 인물들의 연기에도 절제가 묻어 있다. 아쉬움을 남기며 넘어가는 커트와 커트들, 삶의 회한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둡게 처리된 화면들도 마찬가지다. 곳곳에 신비감 넘치는 자연미 역시 말없는 메세지를 위한 장치들이다. 첫 장면인 선학동의 풍경에 대한 묘사 역시 무언의 메세지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그 위에 학이 날아오르는 모습의 뒷산의 학산의 영상이 겹치며, 말없이 '선학동' 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를 알려준다.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찾아내 담은 한국의 사계는 동호와 송화의 한과 곡진한 인생사의 단편들을 은유적으로 반영하는 장치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과거와 현재, 소리와 학산의 전경이 한 커트 속에 담기며 두 마리 학이 날갯짓 하며 힘차게 비상하고, 이어 학산의 모습과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며, 마지막으로 두 마리 학의 모습(학산)만이 클로즙되면서 막이 내리는 것도, 동호와 송화의 사랑이 두 마리 학으로 승화되기를 염원하는 감독의 매세지를 담은 치밀한 연출에 다름 아니다.

감독은 인생에 대한 깊은 연륜 속에 다져진 그만의 철학으로, 절제와 관조의 미학으로, 송화와 동호의 삶을 빌어 구성진 판소리와 함께 한국적인 정서, 시대를 초월해 인생의 영원한 주제가 되어 온 그러나 이 시대에서 질서를 잃어버린 사랑의 또 다른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천년학’-두 오누이의 애틋한 사랑을 가장 한국적인 미를 담은 한폭의 한국화로 그려낸 명작임에 틀림없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