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고양시 덕양구에 세워진 추강 남효온의 시비


경기도 제2청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고양팔현으로 통하는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1454~1492) 을 경기북부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고 13일 밝혔다.

이에 제2청은 연고지인 고양시와 함께 도와 각 시의 홈페이지에 주요업적 소개 및 각 시·군에 포스터를 배포하는 등 홍보에 나섰다.

남효온은 고양시에 거주하다 강직한 선비의 삶을 살다가 39세에 짧은 생을 마감한 인물로 사육신을 흠모해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세상에 사육신의 충절을 전한 인물이다.

조선조 충절(忠節)과 절의(節義)의 상징인 고양팔현(高陽八賢)이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백공(佰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栓)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신분상으로는 명문사대부의 가문이였으며, 시적(詩的)인 재능이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의 일반적인 유자(儒者)들과는 달리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세속과 절록(絶綠)하여 전국을 표박(漂迫)하며 방외인(方外人)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움이 남달랐다고 한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평소 술을 좋아하였지만 어머니의 걱정을 이유로 止酒賦(지주부)를 짓고 끊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 김굉필(金宏弼)·정여창(數汝昌)·김시습(金時習)·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성품이 온화하고 담백하였으며, 영욕을 초탈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맑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스승인 金宗直(김종직) 역시 그를 아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秋江(추강)’이라 했다고 한다.

六臣傳(육신전)을 저술하고 나서 이 때 그의 문인들은 장차 큰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이를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앨 수 없다 하여 六臣傳(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가 전라도 長興(장흥)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478년(성종 9) 세조에 의해 물가에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의 복위를 상소하였으나,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였다.

1480년(성종 11)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마지못해 司馬試(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한 적도 있었지만 그 뒤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金時習(김시습)이 世道(세도)를 위해서라도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권했지만‚ 昭陵이 복위된 후 과거를 보더라도 늦지 않는다며 자신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古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1504년 갑자사화때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외아들 南忠世(남충세)도 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로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며 그도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를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부르고 있으며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을 비롯 宜寧(의령)이 향사(鄕祠), 장흥의 예양서원에 배향되어 그의 절개를 기리게 되었으며‚ 생육신이 창절사에 제향되었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추강의 시신은 당시 고양 대장동 일대의 주민들이 거둬 그곳에 묘소를 만들어 480여년간 묻혀 있다가 1987년 신도시 개발되며 김포 하성면 의령남씨 문중 묘지로 옮겨졌다.

저서로는《추강집(秋江集)》《추강냉화(秋江冷話)》《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선생의 시비가 2007년 11월 11일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선착장 공원에 세워지기도 했다.

장흥땅에서 말년을 보내다

남효온은 소릉복위상소를 올린 후로 여러 곳을 유랑하며 살았는데 전라도에서는 특히 장흥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때 장흥 위씨(魏氏), 수원 백씨(白氏), 영광 김씨(金氏), 인천 이씨(李氏) 등의 유력 사족과 긴밀하게 지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장흥 객사의 별관에 한참 머물며 천관산을 찾고 나루터를 기웃거리며 이리저리 노닐었을 때. 전 사복시 판관(司僕寺 判官) 윤구(尹遘), 전 함열 현감 이침(李琛) 같은 연로한 사족과 장흥 부사의 젊은 자제들과 어울려 가지산에서 발원하는 수령천변(遂寧川邊-지금의 예양강)에서 낚시를 하며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이침은 호는 박호(博湖)이며 자는 可珍. 세종 조 공조판서를 한 李斗信의 증손이자 장흥府使 李叔耕의 자이다. 문종 조 1452년 5월, 생원亞元 登科 급제해 함열 현감으로 부임됐으나, 1455년 을미 7월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즉위하자 모친상을 핑계로 사직하고 不仕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함열 현감시절에 예악과 현가로 고을을 다스려 읍민의 칭송이 있었으며, 공의 사직 이임行路에는 많은 백성이 울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성종 1년 1470년 조부(李斗信.단종 복위운동에 연루 귀양)의 유배 적거지인 長興으로 내려가 후학을 지도하고, 조부와 부친을 위해 효우하였으며,추강 효온,사복판관 윤구, 김양좌, 김시습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남효온과 친하였다. 1491년 홍치 4년 장흥 독곡에서의 남효온과 조유한 일화가 유명하며, 추강은 박호를 위해 조대기[낚시이야기]를 썼다. 일찌기 추강은 생전에 李琛을 가르켜, “효도와 행실은 청렴을 구비 하였고 문무가 겸전한 동방의 志才이네/세월이 그 節義에 감읍하고 시샘하여/ 임금 곁에 가지 못하지만 언제인가 임금께서 부르리니/어찌 태공,강과 엄자룡에 비견하리요/참으로 충절은 또 동방의 可珍이리라' 하였다고 한다.>

남효온은 이침등과 고기를 낚던 바위를 조대(釣臺)라 이름 짓고 글을 부탁하자, '건곤이 정해지며 만물이 나왔으니 우리가 그 혜택을 입었다' 하면서 적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지금 비록 강호에서 낚시를 하며 세월을 보내지만, 하늘이 만물을 낳고 기르며 거두고 감추는 생장수장(生長收藏)이나 용행사장(用行舍藏)의 의리는 피할 수 없는 만큼 항상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여야 한다. 훗날 천은(天恩)이 내리면 그때는 짚신 벗고 낚싯줄을 감고 조정에 나가서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여야 한다. ‘조대기((釣臺記’’


정녕 자신은 세상과 나라를 잊은 듯 살지만 강호의 벗들은 조정에 나가 임금을 제대로 보필하는 자세와 마음을 키웠으면 한다고 읊었던 것이다.

“추강이 남도로 방랑을 떠나던 때는 1941년, 중흥산에서 김시습, 김일손과 이별한 뒤였다.
1492년(성종 23년) 가을, 그는 나주 남쪽의 장흥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기생과 정을 나누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지방 문인들과 시와 술로 한 때를 즐기지 않은 것도 아니었건만, 마음속은 공허하였다. 토지신을 제사지내고 백주에 국화꽃을 띄우며 하루를 즐긴다는 사기(社期: 입추 뒤 다섯 번째 茂日) 한잔 술에 애끊이며 스물 한 수를 연거푸 지었다. 시를 써 내려가며 서울에서 어울리던 벗들이 그리웠다. 그가 떠 올린 벗들 중에는 김시습도 들어 있었을 법하다.(‘추강집’3권, 장흥 偶吟 21수)”-심경호, ‘김시습평전’- 남효온의 죽음’


이처럼 장흥에서 남효온이 장흥偶吟 21수를 지으며 장흥의 유림인과 절친하게 교우했기에 장흥 지방 사림이 광해군 12년(1620)에 이색(李穡)을 위하여 건립한 예양서원에 숙종 7년(1681)에 배향되었다.




▲장흥읍 예양리에 있는 서원으로 남산 언덕에 자리 잡아 장흥읍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다. 남효온 등을 배향하고 있다.




▲암각 '추강사우(秋江祠宇)'-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예양리

예양서원(汭陽書院) 소재. 사진의 암각은 예양서원

뒤편에 있는데 언제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효온과 장흥의 인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