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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방촌마을 이야기<5>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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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22  09: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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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9. 별신제(別神祭)와 무기계(無忮契)

1) 별신제(別神祭)
방촌마을의 정월 대보름날 행해지고 있는 별신제(別神祭)는 언제부터 행해졌다는 문헌의 기록은 없으나 400여년 前 대동계(大同契)가 조직된 시기부터 행해졌다고 전한다. 행사의 큰 의와 뜻은 마을의 무사안녕(無事安寧)과 주민들의 단합(團合)을 기원하는 전통풍속행사이다. 별신제는 여타 마을의 동제(洞祭), 당제(堂祭) 등과 토속적 의미는 비슷하나 유교적 제사인 삼헌(三獻) 제관 중심으로 행하여 절차에서 다른 마을과 구별되며 행사에 매귀가 동참한다. 방촌마을에서는 농악이라고 하지 않고 액운(厄運)을 땅에 묻는다 하여 "매귀(埋鬼)" 라고 하며 독특한 리듬이 전해지고 있는 등 전통적 가치가 있어 앞으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 매귀계 역사와 계보 ◆
①1800년대 등 이전의 방촌마을 매귀계 역사는 문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당대 양반과 상민 등 봉건적 신분제도가 있어 별신제에서 매귀는 무당(당골, 풍물패) 등 특정 신분의 사람이 참여한 것으로 사료된다.(필자 註) 1900년대 들어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중요한 역사는 생존 어른신들의 생생한 증언과 현존하는 마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정월 보름 때 별신제를 모시면서 매귀와 함께 했음이 축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내용 중에는 "불용무격(不用巫覡), 거기존고(去旗存鼓)" "무당을 쓰지 않고, 기는 버리며 북은 둔다." 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별신제 제사 때 무당(천민)에게 매귀(풍물)을 맡기지 않고, 일반(양반)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시대 문화가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축문은 선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을 1930년경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 선생이 일부 정정·보완하여 오늘날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이러함은 이전부터 별신제는 매귀와 함께 해왔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매귀에서 중심이 되는 상쇠는 관산읍 죽교리에 위치한 죽천사(竹川祠)에서 관리인으로 기거하였던 한문용(1895년생 추정)은 꽹과리 재능이 매우 뛰어났으며, 방촌마을 위계섭(1918~1960, 제4대 관산면장)과 당동마을 백남인(1918~?) 두 사람은 한문용에게 재능을 배웠다. 이를 통해 위계섭은 방촌마을에 매귀을 지도, 전수하였다. 백남인은 1950년 6.25사변 후 장평면 우산리로 이사하여 농악을 지도하고 1980년대까지 우산리 농악을 이끌어 왔으며 매귀계의 초청으로 별신제에 자주 참여하였다.

방촌마을은 1960년 중반에는 180여 가구, 주민의 수는 1,100여명이 되어  이정을 책임지는 이장 아래에 행정 서기 1명을 둔 큰 마을이었다. 당시에는 매귀도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있었으며, 상쇠 위계섭에게 지도 받았던 사람들로는 동쪽에 아들 위연량(1940~1988, 동산밑), 위대환(1934~2016, 내동), 임창모(1934년생, 동산밑)가 있다. 서쪽에는 위계형(1922~2014, 탑동), 위은환(1924~1981, 호동), 위재열(1933~2011, 탑동)이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1960~1970년대 매귀는 재능 전수를 통해 발전을 거듭하면서 보름날 가가호호(家家戶戶)의 지신밟기는 동ㆍ서쪽으로 나뉘어 실시하고 등밭마을 논에서 모시는 별신제 제사에는 합동으로 참여했었다. 이때 매귀패가 논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서로 먼저 영기(令旗)를 들어오려고 경쟁하기도 했었다.

   
   
 

이후 1976년(이장 위연량) 동쪽과 서쪽의 매귀는 합하여 매귀계(埋鬼契)를 조직하여 보름날 별신제와 2일간 지신밟기, 음 2월 1일 하드랫날 행사를 주관하였다. 이를 통해 단합하면서 매귀 재능 전수와 보존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이장 위노환) 이농현상에서 따른 고령화로 매귀계를 대동계 산하로 개편하고 보름날 별신제를 대동계에서 주관하여 모시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매귀계의 책임을 맡았던 계장(契長)은 주로 상쇠를 담당한 사람들로 위은환, 위연량, 위재열, 위대환, 위노환(1944~2020, 호동), 위헌량(1949년생, 범산), 장구 위수환(1944년생, 호동) 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보유하고 있던 재원은 1999년 마을회관 건립에 헌성하였다.

②매귀는 영기(令旗), 사령기(司令旗), 덕석기와 꽹과리, 징, 장구, 북, 대포수, 조리중, 양반, 나팔 등으로 구성되며, 각자의 재능의 따라 의상이 구별된다. 별신제 행사시 매귀패로 활동해온 주요 악기 계보 인명을 기술한다.

   
 

▲꽹과리 상쇠(부쇠ㆍ종쇠) : 위계섭, 위계형, 위은환, 위재열, 위대환, 위연량, 임창모, 위종환(1935년생, 산저), 위노환, 위헌량, 위공환(1947년생, 계춘동), 이성격(1956년생, 탑동), 위백(1965년생, 산저) ▲징 : 위동량(1918~1988, 내동), 위성량(1931~2015, 범산), 위종환(1932~2003, 등밭), 위수환(1934년생, 산저), 위길환(1953년생, 범산), 위봉현(1959년생, 탑동) ▲장구 : 위사량(1924~1988, 호동), 위종량(1928~2000, 내동), 위염량(1938~2003, 산저), 위수환(1944년생, 호동), 위성종(1945년생, 시흥시 거주), 위숙환(1951년생, 서울시 은평구 거주) ▲북 : 위계동(1911~1975, 탑동), 위복량(1915~1989, 새터), 위신량(1920~1985, 동산밑), 위욱량(1921~1994, 내동), 위득환(1923~1990, 탑동), 위정환(1924년생, 동산밑), 백형수(1941년생, 새터), 위성계(1949년생, 탑동), 위여량(1954년생, 산저) ▲대포수 : 위권량(1936~1997, 산저), 위성염(1973년생, 산저) ▲조리중 : 정일남(1915년생 추정~?, 송현마을), 위상량(1917~1975, 탑동), 위장환(1920~1984, 내동), 위팔만(1933년생, 호동 번덕지), 위성선(1951~2002, 내동), 위흥환(1945년생, 등밭), 위점환(1950년생, 계춘동) ▲양반 : 위재현(1954년생, 계춘동) ▲나팔 : 위명환(1925~1982, 탑동) ▲영기 : 위외환(1940~1995, 산저), 위계환(1942~2019, 계춘동), 위두량(1947년생, 산저), 위성신(1955년생, 탑동) ▲홀기(笏記) 점검 및 축문(祝文) 작성 : 위욱량(1921~1994, 내동), 위용철(1922~2008, 계춘동) 위성환(1929년생, 내동), 위봉환(1930~2002, 새터), 위성량(1931~2015, 범산), 위진환(1937년생, 등밭), 위인환(1946년생, 새터) ▲허수아비 만들기 : 위문환(1917~?, 호산), 위팔만(1933년생, 호동 번덕지), 백형수(1941년생, 새터) ▲고깔모자 만들기 : 위명환(1925~1982, 탑동), 문복현(1929~2000, 새터), 위재열(1933~2011, 탑동) 등이다.
매귀에서는 여러 부자(父子)가 같은 악기를 다루면서 재능이 뛰어나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이어졌음이 확인된다. 이밖에 이농과 고령화에 따른 청장년층 부재로 매귀 계원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자연 감소되어 2000년경부터 일부의 부녀자도 참여하는 등 급격히 변화되어 가는 농경문화를 볼 수 있다. 아울러 현재 매귀계를 이끌고 있는 위헌량(상쇠), 위수환(장구)등의 체계적인 재능 전수(傳授)는 필수 과제이다. 

2) 무기계( 無忮契)

안항(顔巷) 위덕후(1556~1612)가 1576년경 인근 당동마을에서 방촌으로 입향(入鄕)하였다. 이미 살고 있던 任氏, 朴氏, 白氏, 金氏 등과 어울려 살다가 위씨의 세력이 넓혀지면서 위씨 집성촌을 이루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무기계는 1791년(정조 15년) 방촌의 위씨 친족 30여 명이 원취당(願醉堂) 위도순(1739~1796) 선생을 중심으로 종친간의 화목을 목적으로 契를 결성하자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 선생은 시기하지 말고, 서로 화목 하라는 뜻으로 “무기계(無忮契)”라 명명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선생은 무기계 서문에서 ‘시기(猜忮)’의 자학적(字學的)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시(猜)’ 자는 ‘犭’ 변에 ‘청(靑)’ 자를 붙였으니 개의 마음이고, ‘기(忮)’ 자는 ‘忄' 변에 ‘지(支)’ 자를 붙였으니 남과 함께 하지 않는 갈라진 마음이라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시기는 온갖 惡의 근원이고 온갖 善의 원수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우려하는 점은 계(契)에 재산(財産)이 있는데 재산이란 다툼의 창고라고 여겼다. 즉 재산으로 인해 알력이 생겨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부자간에도 용서하지 않은데 촌수가 먼 일가 친족의 경우는 말할 나위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기(忮)’ 자 즉 남을 해치는 마음은 싸움을 일으키는 곳이다. 잘못되면 도리어 위씨문중의 쇠망을 재촉한다고 걱정하면서 무기계라 칭하였다.

당시 조직원은 道純, 道立, 道及, 守粱, 道運, 道佺, 道洽, 道峻, 道澗, 道玉, 道任, 道億, 道英, 道集, 道昕, 道約, 榮一, 道經, 道晃, 榮國, 榮夏, 道根, 道璘, 道晟, 道輯, 道珏, 道秀, 道植, 道勳, 廉宗揵으로 그 장자(長子)가 승계하여 왔는데, 현재는 추입 한 계원들이 있어 4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무기계는 옛 어른들이 활동했던 것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여름에는 중복(中伏) 날 자복(煮伏)을 통해 계원들의 화목을 도모하고, 음력 2월에는 좋은 날을 택해 천관산 아래 계양산에 설치된 제단에서 밤 11시(子時)에 유사(有司) 집에서 준비한 제물을 설찬하고 제관들과 계원들이 참석하여 산신제를 모시며, 다음날 계원들이 모여 계 자금 운용에 대한 결산을 하고, 마을의 발전과 계원간의 화목에 대한 회의를 해왔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2018년 12월 마을 총회를 거쳐 일부 개정되었다.

   
 

모든 마을 주민은 대동계 계원이 되고, 천관산 산신제를 4월 둘째 주 토요일 밤 11시(子時) 천관산 아래 계양산 제단에서 제관들과 계원들이 참석하여 대동계에서 준비한 제물을 설찬(設饌)하고 산신제를 모셔 마을의 평온을 기원드리고 있다.

   
   
 

다음날 일요일에 주민(계원)들이 모여 계 자금 운용에 대한 결산을 하고, 마을의 발전과 주민간의 화목에 대한 회의를 한다. 2019년부터 일요일 행사를 "방촌의 날"로 제정하여 서울, 광주 등에서 거주하는 출향인들이 참석하고 마을 내 90세 이상 어르신들을 회관으로 초청하여 위안행사를 열어 경노사상을 고취하면서 주민 화합과 마을 번영의 잔치한마당 행사를 갖고 있다. 무기계의 재원은 논3두락과 일정액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천관산 산신제 축문 번역문>
천관산의 神은 높고 높이 솟은 큰 뫼로 남해 바다의 섬들을 진압(鎭壓)하고, 중주의 맑은 기운 듬뿍 담아 모아 이 땅에 가득하니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이 피어나도다. 암봉(巖峰)이 뾰족뾰족 높이 솟음에 샘물은 맑고 활기차며 들판엔 물이 넘치고 심어 거둔 곡식은 넉넉하다. 계곡 기운 두터우니 草木이 무성하고 밑바탕 백성들은 우러러 낳고 자람에 의지하고, 영웅과 재주꾼 자주 일고 文武官이 함께 나타나게 하소서. 한갖 우리는 지켜보겠사오니 신령(神靈)스럽고 기이함이 밝게 들춰나고 좋은 기운 빛나게 두들기니 신선 음악 은은히 퍼지고, 뭇 칭찬 모여 조화롭게 도우며 크고 작은 펑퍼짐한 언덕에 시키신 대로 命에 따르겠나이다. 풍우상로(風雨霜露) 흥얼거림을 막고 오직 한결같은 이 땅에 각자 스스로 정백하게 하며 경계치 말고 서로 믿고 다함께 신령님 쉴 곳 맞아 이에 단선을 청소하고, 생(牲)과 폐를 올려 조심스레 닦고 깨끗하게 하여 감히 온갖 정성 바치오니, 엎드려 바라오건데 명신께서는 降臨하시어 작은 정성 살피시고 우리들을 도와 영험(靈驗)을 일으키시면 생을 다하여 힘껏 받들겠나이다. 낳고 자란 삼원에 위로는 백성의 나라를 울리고, 아래로는 풍속(民風)을 돈독(敦篤)히 해서 백성들은 농가(農歌)를 부르고, 선비들은 손님 받드는데 정성을 다 한다면 분명히 이름난 마을에 질박하고 순박함이 반복 순환해서 좋은 칭찬 완유하여 진실로 모든 공이 신께로 돌아 갈 겁니다. 신과 사람이 서로 의지해서 천년만년토록 이 같이 길하고 깨끗함을 올려 해마다 계속하겠사오니, 신께서는 우리와 같이 좋은 음식 먹고 우리와 같이 좋은 음악 들읍시다. 삼가 맑은 물과 깨끗한 잔 조심스럽게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10. 현대 인물 및 과제
위계본(장흥군 유도회장), 위덕량(장흥향교 전교), 위계섭(관산면장), 위욱량(장흥향교 전교), 위용철(1999년 기묘보 편찬 도유사), 위민환(전남일보 주필), 위승환(관산면장), 위성탁(초등학교장), 위황량(장흥향교 전교), 위성렬(유물전시관건립추진위원장), 위규량(초등학교장), 위임환(육군 중령), 위성용(경제기획원 경제협력관, 아시아개발은행 이사), 위각환(의학박사 병원장), 위성백(육군 대령, 에스원 사장), 위기량(중등학교장), 위맹량(시인), 위성복(조흥은행장), 위풍환(의학박사 병원장), 위두환(양천구의회 재선의원), 위백량(법학박사 일본 오사카대학교 교수), 위동환(국립현충원장 이사관), 위용환(화가, 신한은행 지점장), 위성동(송원대학교 총장), 위지환(우신기계 대표이사), 위추량(물리학박사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 위공환(농촌지도자 중앙회 이사), 위성철(공군 중령, 항공사 기장), 위성(문화관광해설사), 위영희(광주시청 서기관), 위성천(장흥축협조합장), 위내환(초등학교장), 위홍환(문학박사, 중등학교장), 위성문(국민은행 지점장), 위경애(서예가), 위행복(문학박사 한양대 교수), 위황(국민은행 지점장), 위근량(그린내장건설 대표), 위평량(중앙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위승철(경기도의회 의원), 위성근(신한은행 지점장), 위구복(의학박사 병원장), 위상배(경영관광학박사 서정대 교수), 위형운(양천구의회 의장), 위평환(삼성전자 상무), 위승훈(회계사), 위대훈(변호사), 임병록(법원 서기관), 위성웅(화가, 동국대 강사), 위구연(전자공학박사 미국 하버드대학교 석좌 교수, 삼성전자 Fellow), 위재천(KBS 아나운서), 위수영(서경대학교 피부미용학박사, 위뷰티 대표), 위정희(송파여성문화회관 관장) 등이다.

방촌마을 주민들은 전통문화에 대한 존속 의지가 강하여 맥(脈)은 이어져 오고 있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離農)현상, 고령(高齡)화, 문화 환경변화 등으로 존속에 어려움이 현실화 되어 가고 있어 걱정이 앞선다. 퇴직자 등 출향인들의 적극적 귀향이 간절하다. 장흥군 내 마을 단위로는 흔치 않게 존속되고 있는 매귀의 보존 및 문화재 지정과 관리에 따른 건물 신축  등에서 주민의 재산권 행사 제한에 대하여 전라남도(장흥군)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사료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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