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지난 <2009,4,30자 기고문>을 재정리 보충한 글입니다.)

1. 천방 선생의 “소시(梳詩)” - ‘오현사’로 불리는, 장흥 ‘예양서원’에 모셔진, ‘천방 유호인(劉好仁,1502~1584)’ 선생에 대한 최근 관심에 다시 반갑다. 천방(天放)선생 연구사례는 <장흥문화 10호>에 실린 ‘행록(行錄)’ 소개가 최초라 여겨진다. 지금은 <국역본 2종(강릉유씨종중/이봉준)>에 이르렀지만, 그간에는 <정묘지(1747)>에 기록된 내용마저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천방선생은 원래 ‘부동방 건산’ 출신이기에 <정묘지 부동방 남행> 편에 나오며, ‘남명 조식’에게 수학했다고 했다. 1534년 진사입격 이후로 사자산 연하동에 은거하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매진하셨다. 두 번에 걸쳐 참봉 부름을 받았지만 끝내 나아가지 아니했다. <정묘지>는 “영소(詠梳) 詩” 전문(全文)을 소개하면서 ‘기시문의리(其詩文義理) 구도개뢰(俱到皆賴)’로 평가하였다. 선생을 ‘향당사종(鄕黨師宗)’으로 모시고서, ‘申영천祠’에 배향한 사정을 기록하였다. <천방유집/ 정묘지>에 수록된 “소시(梳詩)”부터 소개한다. 문림장흥의 역량을 다시 드높여 주는데, 출처 판본에 따라 원문이 조금씩 다르다
梳(소/빗)
木梳梳了竹梳梳 / ‘목소’ 얼레빗질 하고서 ‘죽소’ 참빗질
亂髮初分蝨自除 / 난발은 가지런해지고 이(蝨)는 없어져
安得大梳天萬尺 / 어찌하면 천만尺 ‘대소’로 큰 빗질하여
盡梳黔首蝨無餘 / 백성 머릿속 이(蝨)를 남김없이 없앨까

요컨대, “백성(黔首)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蝨)을 크나큰 대소(大梳) 빗질로 없애버리자”는, 민중적 시각의 우의(愚意)가 깃든 작품이다. 천방선생은 ‘금수,곤충,꽃,채소, 나무, 풀, 과실, 복식, 문방구’ 등 주변사물에 관한 격물치지 관점에서 유니크하게 노래하였다. 말로만 읊대는 재도(載道)가 아니라 몸으로 대하는 궁행(躬行)이 중요했다. 그런데 “소시(梳詩)” 작자를 두고 큰 혼돈이 있었다. ‘허균(1569~1618)’의 <학산송담, 성수시화, 국조시산>과 ‘남용익(1628~1692)’의 <기아>, ‘장지연(1864~1921)’의 <대동시선> 등이 큰 평가를 하면서도 원작자를 ‘무명씨, 실명씨, 지리산 거사, 유호인(兪好仁.1445~1494)’ 등으로 오도하였는데, ‘천방 劉好仁’과 ‘뇌계 兪好仁’은 서로 다른 인물이다.
근래 들어 <‘허균’이 가려 뽑은 조선시대 한시(1999)>라는 ‘허균 시평집 번역서’도 예전 잘못을 답습하였다. 그러나 존재선생이 “소시변(辨)”에서 논증 하였듯이 ‘천방 유호인’이 원작자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제는 ‘예양서원’ 마당에 오현 시비(五賢 詩碑) 세트에 들어가는 “소시” 비를 세우거나, ‘천관 문학공원’에 “소시” 시비를 따로 세워봄직 하겠다.

2. 존재 선생의 “소시변(梳詩辨)” - 아마 존재선생의 비판적 현실인식으로는 천방선생의 “梳詩”야말로 지극히 훌륭했으리라. “소시辨”은 <존재전서>에도 <천방유집>에도 실려 있다. “아아, 이 빗을 읊은 일절운어(一絶韻語)도 천성(天成)이요 의치구족(意致俱足)하도다. 시집백수(詩集白首) 중에 더욱 기절(奇絶)하니, 사람들에 회자(膾炙) 전파되어 암송되기를 이제에 이르렀다. 혹자는 이르기를 ‘무명씨’라 하고, ‘제학 남용익(南龍翼)’은 <청구풍아>에 이 시를 끌어 들여 ‘무명씨’라 일렀다.
혹자는 ‘유뇌계(兪뇌溪)’라 인정(認定)하고 있다. 대개 이 시집은 반곡 정공(盤谷 丁公)이 ‘於(어)삼석(三席)’에서 ‘집록수서(輯錄手書)’하여 그 후손에게 남긴 것이니, 천방선생이 지으신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해산(海山)으로 막힌 거친 벽지(僻地) 문호(門戶)가 쓸쓸할 정도로 가난하니, 한번 잘린 화초도 오히려 보존치 못하거든, 이미 평천(平泉) 성주석(醒酒石)이 되어버렸으니, 어느 정황에 선생의 자리 위에 있는 아름다운 옥돌을 뉘 있어 즐겨 백형(白珩)이라 묻고 연성지가(連城之價)를 놓겠는가! 선비의 불우(不遇)함이 예로부터 위와 같으니 후인은 이를 읽고 반드시 단금(斷琴)의 장탄자(長歎者)가 될 것이로다. (그런데 존재선생이 그 오도 사례로 예시한 ‘남용익’의 <청구풍아>는 <기아>가 옳다.)”
한편 일각에서는 “소시辨”을 이해함에 ‘반곡 정경달(1542~1602)’이 <三席手書>를 쓴 것으로 오해하여 ‘반곡’을 작자로 오인했으나, 윤호진 교수의 지적대로, 또한 <장흥문화 제10호> 소개처럼 천방선생이 그 작자이다. <三席手書> 책자는 없으며, ‘반곡 정경달’이 스승의 곁, 於三席 위치에서 스승 기록을 집록 手書했다는 것. 장흥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로 ‘반곡 정경달’은 천방선생의 애제자였다. “梳詩”는 <천방유집/정묘지>에 확인되듯이 천방선생이 쓰신 것임에 틀림없지만, 이 부분 사정을 장흥사람들은 여태껏 바깥에 제대로 말하지 못해왔다.
<장흥문화 10호>는 존재선생의 “소시辨”을 ‘영소(詠梳) 詩에 대한 변론’이라 옮기기는 했었으나, 정작 “梳詩” 원문 제시를 생략하여 원작시의 중요성을 짚어내지 못한 점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그 시절에 “소시辨”을 통하여, 같은 고을의 선학, 천방선생의 의로움과 불우함을 늦게나마 달래주신 존재선생을 다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부기>
1). <천방유집>에 실린 목판도 2점을 존재선생이 직접 그렸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존재선생은 <천방유집>에 기록된 대로 제3자적 관점에서 “평(評)”을 남긴 것일 뿐, 그가 직접 “작(作)/화(畵)”하지 아니했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두고 자평(自評)할 이유도 없고, 그 현장방문과 作畵사정을 뒷받침하는 어떤 정황기록도 없다.

2). 참고문헌- 존재 위백규 문학연구(김석회,1995)/허균이 가려 뽑은 조선시대 한시3 (강석중 외, 1999)/‘소시’에 대한 평가와 작자(윤호진 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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