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艸衣恂公 旣示寂 其徒善機梵雲等 妥其像于室 而求賛於余 即樂應之 又治珉而求銘于余 始以不習內典 辭十易霜 而求益堅 乃以所見聞於恂公者 爲之言曰 宗風之不振於世久矣 

近時諸方叢林中 幾無聞者 厥咎安在 由禪講之論岐 而頓漸之辨混 投機少而然也 恂公奮于南服 博究孤詣用能 溯一眞之源 集衆論之粹 而南方學者 翕然從之 豈不偉哉 按師法名意恂 字中孚 務安張氏子 方其身也 母夢大星投懷 以丙午四月五日來 丙寅八月二日逝 輒與佛瑞彿 星出時 僅差數日 其亦異矣 五歲時出遊江渚 誤墮於悍流中 若有挾而出者 弱冠過月出山 愛其奇秀 不覺縱步 獨躋其巓 望見滿月出海 怳若杲老之遇薰風 去却碍膺之物 自是以往 所遇無所忤者 殆其有宿氣而然歟 緇其衣於碧峯聖公 受信具於玩虎禹公 草衣其拈花之號也 演敎之餘 兼習梵字 而通呿盧之旨 又善神象 而入道子之室 從茶山承旨 受儒書 觀詩道而後 精通敎理 恢拓禪境 始有雲遊之奧 入楓岳 登毗廬 盡閱嶺東西山海之勝 歸而歷京都諸山 海居都尉與紫霞秋史兩侍郞 命駕從遊 與共唱酧 皆以東林遠公西岳貫休目之 聲名噪於一時 師乃歛跡弢光 就頭崙山頂藤蘿陰中結一小庵 扁曰一枝 獨處止觀四十年餘 或有問者曰 子其專於禪者乎 師曰機苟不利 則專於禪 與專於敎 無以異也 吾何苦爲此哉 其意盖以專敎者 未必無失 而專禪者 亦未爲得也 白坡璇公 隱白羊山 年八十餘 自云從十六歲投禪 未嘗一念退轉 每演臨濟玄要句 分貼機用 以爲悟徹 師因辨坡誤處 以寄示余 余又辨師誤處 師笑受之云 不妨俱誤 誤處即是悟處也 師軀幹豊碩 梵相奇古 類古尊者象 旣耋艾而輕健如少年 當奉恩寺有大敎刊布之役 邀師爲證師 達摩山建無量之會 奉師主禪席 皆暫膺即還 示化於一枝菴中 現世之年 八十有一法臘爲若干歲 嚮余治舟師於湖南也師過焉 或謂非余莫能致 倘其然乎 繼聞唁秋史於瀛洲 風濤甚險而弗懾 心甚偉之 後余承恩 譴居鹿苑海中 師又再至焉 余於銘師也 不宜辭 銘曰 初祖西來 建第一義 廓然無聖 是亦文字 弗即弗離 始名不二 槩云掃除 殆非祖意 惟師眼中 有八萬藏 是一字字 皆放圓光 千七百則 四十二章 約而觀之無短無長 處世非染 出世非淨 惟有情人 能見其性 鯨濤眩轉履之如鏡 何以無畏 一於動靜 頭崙之頂 借棲一枝 太白老胡復借之衣 文佛慧命 僅如懸絲 宗風再振 廣被諸機 禪無可入講無可捨 從容而至 何事呵罵 一喝而聾 頑禪打坐 是草衣人 普濟尊者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兵曺判書判三軍府義禁府事 申櫶撰

출전 [艸衣詩藁]卷之下

注)

受信具於玩虎禹公 - 초의 대사의 법맥은 

청허휴정 → 편양언기 →  풍담의심 →  월담설재 →  환성지안 →  호암체정 →  연담유일 →  백련도연 →  완호윤우(玩虎倫佑, 1758~1826)  →  초의이다. 

止觀 - 지관은 지[止]와 관[觀]의 상반된 개념의 합성어다. 지[止]는 범어 Samatha의 번역이다. 사마타[舍摩他]. 사마타[奢摩他]라 음역한다. 모든 상념을 멈추고 생각을 끊어 마음이 적정[寂靜]해진 상태를 말한다.

관[觀]은 범어 vipasyana의 번역이다. 관찰[觀察]이라고도 한다. 또한 지혜로 객관의 대경[對境]을 비춰본다는 뜻인데 관념[觀念]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초의 대종사 탑비 명

초의 의순 공(草衣意恂公)은 이미 열반하셨는데 그의 문도 선기와 범운(善機梵雲) 등이 그의 형상을 방에 모셔놓고 나에게 찬문(贊文, 인물을 논평하여 기리는 글)을 요구하기에 바로 즐겁게 응낙하자 다시 옥돌을 다스리면서(治珉, 빗돌을 다듬으면서) 나에게 갈명(碣銘)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내전(內典, 佛敎)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사양하였으나 10년이 바뀌어도 더욱 굳세게 요구하므로 이에 의순 공(意恂公)에게 보고들은 것을 그를 위하여 말하기로 했다.

종풍(宗風)을 세상에 떨치지 못한지가 오래인지라 근래 여러 지방 총림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자가 거의 없었으니 그 허물은 어디에 있는가.

선방과 강원의 논의가 갈리고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분별이 혼돈되어 의기투합하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의순 공이 남방의 땅에서 분발했으니 두루 참구하고 외로이 나아가 하나의 참(一眞) 근원을 소급하고 중론(衆論)의 순수함을 모았다.

그러자 남방학자들이 화합하여 따르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이에 대사의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자는 중부(中孚)이며 무안 장씨(務安張氏)의 아들이다.

이제 막 이 아이를 가졌을 때 어머니는 큰 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병오년(정조10년1786) 사월 닷새날에 오셨다가 병인년(고종3년1866) 팔월 이튿날에 가셨다.

바로 부처님과 비슷하게 명성(明星)이 출현할 때와 겨우 며칠 차이이니 이 또한 기이하다.

다섯 살 때 강가에 나가 놀다가 잘못하여 사나운 물길 가운데 휩쓸렸는데 부축하여 내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약관(弱冠, 스무 살)에 월출산(月出山)을 넘어가다 유달리 수려한 산수를 사랑하여 자신도 모르게 활보하다가 홀로 그 산꼭대기를 오르고 말았다.

둥근 달이 바다에 떠오르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자 높이 뜬 해가 훈훈한 남쪽 바람을 만난 것처럼 황홀해서 가슴에 거리  끼던 물건들이 사라졌다.

이후로는 만나는 것들 모두가 거스르는 것이 없었으니 아마도 그에게 전세에 익혀 온 습기(宿氣)가 있어서 그러했던가보다.

벽봉 민성 공(碧峯珉聖公) 문하에서 치의를 입은 중이 되고(출가하고) 완호 윤우 공(玩虎倫佑公) 문하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초의는 그가 전법 계(拈花)를 받은 법호이다.

교리를 널리 펼치던 여가에 겸하여 범자(梵字)를 익혀서 거로(呿盧)의 뜻을 통달했으며 또 초상화(神象)를 잘 그려 오도자(吳道子, 당나라 화성畫聖. 불상을 잘 그렸다)의 경지에 들었다.

승지(承旨) 정 다산(丁茶山)과 종유(從遊)하며 유학 경전을 배우고 시를 짓는 올바른 이치(詩道)를 익힌 다음에 교리에 정통하여 선의 경지(禪境)를 널리 개척했다.

처음에는 구름과 노닐겠다는 심오한 뜻(奧旨)을 품고 풍악산에 들어가 비로봉에 올라 영동과 영서의 산과 바다의 절승을 모조리 구경하고 돌아와 수도(京都)의 여러 명산들을 두루 돌아다니며(遊歷) 해거도위(海居都尉) 홍현주(洪顯周)와 자하(紫霞) 신위(申緯)ㆍ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두 시랑(兩侍郞)과 수레에 멍에를 매어 타고 더불어 사귀며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옛날의 동림사(東林寺) 혜원 공(慧遠公)이나 서악(西岳)의 승려 관휴(貫休)라고 지목하자 명성이 일시에 떠들썩했다.

대사는 바로 자취를 거두어 그 빛을 갈무리하고서 두륜산(頭崙山)으로 들어가 산정(山頂) 등나무 덩굴 그늘 속에 작은 암자 하나를 짓고 일지암(一枝庵)이라고 편액을 내걸었다.

이곳에서 홀로 거처하면서 지관(止觀)을 닦으며 40여년을 지내자 간혹 묻는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아마도 참선만을 전념하는 자인가보다.”라고 하면 대사는 대답하기를, “근기에 진실로 이익이 되지 않으면 선에 전념하거나 교에 전념하거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와 같이 고행만을 일삼겠습니까.”라고 했다.

그 뜻은 대체로 교에만 전념하는 자도 반드시 잃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고 선에만 전념하는 자도 이득만 있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백파 긍선 공(白坡亘璇公)이 백양산(白羊山)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80여세가 되자 스스로 말하기를, “16살부터 선에 투신해 한 생각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 매양 임제의 현묘한 요지 구(臨濟玄要句)를 널리 펼칠 때마다 기ㆍ용을 나누어 붙이고(分貼機用) 철저하고 크게 깨달았다(大悟徹底).”고 생각했었다.

대사께서 백파의 잘못된 곳을 변별하여 나에게 부쳐왔기에 내가 또 대사의 잘못된 곳을 변별했다. 대사께서는 웃으시며 받아들이고는 말씀하시기를, “함께 잘못해도 무방하나 잘못된 곳은 바로 깨달은 곳이다.”라고 했다.

대사는 체구가 풍만하고 범상(梵相, 부처님 상)으로 기이고아(奇異古雅)하여 옛 존자의 형상을 닮았다.

이미 노인네(耋艾)가 되었어도 경쾌하고 건강해서 소년 같았고 봉은사(奉恩寺)에서 대교(大敎, 화엄경)를 간행 배포하는 일이 있을 때 대사를 맞아들여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삼았고 달마산(達摩山)에서 무량회(無量會)를 베풀 때 대사를 받들어 선석(禪席)을 주관(主管)하게 하였으나 모두 잠깐 받아들였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일지암에서 열반에 드시니 지금 이 세상 나이는 81세이고 법랍은 약간 세월이 된다(65년).

지난번에 내가 호남에서 수군(水軍, 舟師)을 지휘하고 있을 때(헌종9년1843년~헌종14년1848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대사가 지나다가 들렀다. 혹자는 내가 아니면 대사를 초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설마 그렇기야 했겠는가.

이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대사가 제주도에서 추사에게 “제주도의 바람과 물결이 심하고 험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으니 마음은 정말로 위대하다.

나중에 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녹야원(鹿野苑, 興陽鹿島) 바닷가 마을에 유배 가서 살 때(헌종15년1849년~철종8년1857년) 대사가 다시 두 번이나 찾아주었으니 나는 대사의 명문(銘文)을 사양하기에는 적당치가 않다.

명에 이르기를.

初祖西來 초조 달마가 서쪽에서 와

建第一義 최상의 진리를 베풀며

廓然無聖 텅 비어 聖이랄 것이 없다했는데

是亦文字 이것도 문자라서

弗即弗離 나아가지도 떠나지도 않아야

始名不二 비로소 이름하여 둘이 아니라고 한단다.

槩云掃除 평미레로 쓸어버리라고 하니

殆非祖意 아마도 조사의 뜻은 아닐 게다.

惟師眼中 대사의 안중에는 오직

有八萬藏 팔만대장경만이 있었으니

是一字字 이 하나의 글자 글자마다

皆放圓光 모두가 원만한 빛을 내고 있구나.

千七百則 일천 칠백 칙 공안과

四十二章 사십 이 章經을

約而觀之 요약해서 살펴보면

無短無長 짧은 것도 없고 긴 것도 없단다.

處世非染 속세에 살아도 물들지 않고

出世非淨 속세를 벗어나도 청정한 것 아니니

惟有情人 오직 뜻이 있는 사람이라야

能見其性 능히 그 性을 볼 수 있으리라.

鯨濤眩轉 고래 같은 물결에 눈이 어른거려도

履之如鏡 펀펀한 거울을 밟는 듯하니

何以無畏 어떻게 두려움이 없으랴마는

一於動靜 동과 정이 한결같기 때문이란다.

頭崙之頂 두륜산 산정에서

借棲一枝 일지암 빌려 살았는데

太白老胡 태백 노호가 와서

復借之衣 다시 옷을 빌려 주었네.

文佛慧命 석가문불(釋迦文佛) 비구로

僅如懸絲 겨우 실낱같이 매달려 있는 

宗風再振 종풍을 거듭 진작시키고

廣被諸機 모든 機緣 널리 입히셨도다.

禪無可入 더 이상 禪에 들어갈 수 없고

講無可捨 더 이상 講演은 버릴 것이 없어라.

從容而至 조용하게 이르렀으니

何事呵罵 무슨 일인들 꾸짖을 줄이야.

一喝而聾 한 소리 할은 귀가 먹은 듯하니

頑禪打坐 가부좌하고 참선만 고집하네.

是草衣人 이 사람이 초의고

普濟尊者 보제 존자이시니라.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兵曺判書判三軍府義禁府事 申櫶撰

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병조판서 판 삼군부 의금부사 신헌은 짓다.

역자 注)

위 탑비명은 〚古歡堂收艸文稿〛卷之三에 실려 있고 姜瑋(1820~1884)의 代作이라고 되어 있다.

개화파 강위는 1876년 한일 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 申櫶(1810~1888)을 막후에서 보좌한 인연이 있다.

石顚鼎鎬(1870~1948)가 “草广遺稿叙”에서 近古 선가 문단의 맹주라고 평가한 禪僧 草广復初(1841~ ?)와 강위는 僧俗을 초월한 同志이며 불교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지닌 申櫶ㆍ申正熙(1833~1895) 父子와 초엄과는 師弟間이며 知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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