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白坡講師傳

師名亘璇。號白坡。室曰龜山。茂長人。出家於禪雲寺。遊學四山。徧覽五敎。住錫於淳昌之龜岩。開門接乘。講者。三十餘年。退處別院。辨別於不便者。居多。曰起信之記細小。難便於講學者。以大字開刊。齋儀之散行者。會集開刊。名曰龜鑑集二卷。禪門綱要之難解者。集註開刊。曰禪門手鏡。內外之私記。任便學者。甚多矣。師示寂。收集行狀。上金秋史。秋史。序之曰。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年。藉手着力處。或有以機用殺活。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殺活機用。雖大藏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妄以殺活機用。爲白坡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爲足以知白坡也。昔與白坡。徃復辨難者。即與世人不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雖萬般苦口說。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以爲白坡碑也。書示白岩雪竇諸門徒。大書一行曰。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銘曰。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眞實。厥名兮亘璇。不可說轉轉。師自賛曰。頭髼鬆兮眼卓朔。此其老僧眞面目。上拄天下拄地。佛祖元來覔不得。呵呵呵是甚麽。南北東西唯是我。立碑。于禪雲寺。碑。叅判金正喜秋史撰。雪峯之嗣。退庵之孫。雪坡彥之曾。虎岩淨之玄。弟子。有龜峰道峰定觀白岩影山惠庵等。文集四卷。行于世。

출전 [東師列傳]第四

注)

五敎 - 오교는 ① 소승교(小乘敎) : 소승을 위해서 사성제, 12인연 등을 설한 아함경. ② 대승시교(大乘始敎) :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반야심경이나 연기에 의하여 모든 존재와 현상을 설명하는 해심밀경 등. ③ 대승종교(大乘終敎) : 모든 것은 본래 불변의 진여인대 그것이 연(緣)으로 말미암아 오(汚)와 정(淨)으로 나타나는 것을 설하는 기신론의 가르침. ④ 돈교(頓敎) : 당장 깨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설하는 유마경. ⑤ 원교(圓敎) : 일승(一乘)을 설하는 화엄경ㆍ법화경의 가르침, 특히 화엄경의 가르침을 말한다.

大機大用 - 깨달음의 원숙한 경지에서 나오는 자유자재한 활동력. 살활 자재(殺活自在)한 활동력.

 

❍백파 강사 전(영조43년1767~철종3년1852)

대사의 법명은 긍선(亘璇)이고 호는 백파(白坡)이며 살던 절집의 당호(堂號)는 구산(龜山)이고 전라도 무장 현 사람(茂長人)이다.

전라도 고창 선운사(禪雲寺)로 출가하여 전국의 산문(山門)에서 유학(遊學)하면서 오교(五敎, 석가의 一代 교설을 5종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의 경전을 두루 열람했다.

전라도 순창 구암사(龜岩寺)에 주석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승려학인들을 맞이하여 강론한 지 삼십여 년이 지나자 별원(別院)으로 물러나 살면서 변별하기가 불편한 서적들을 손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말하자면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는 글자가 너무 작아 강학하는 사람들이 편치 못해 큰 글자로 개간(開刊)했고 산발적으로 간행되었던 〚재의齋儀〛를 한데 모아 개간하면서 〚작법 귀감 집作法龜鑑集〛 2권이라 이름 짓고 〚선문강요禪門綱要〛의 이해하기 어려운 곳에 집주를 달아 개간하고서 〚선문수경禪門手鏡〛이라 하고 내외 전(內外典)의 사기(私記)까지도 학인들을 편리하게 한 것이 너무 많다.

백파대사가 시적(示寂)하자 행장을 수집하여 김 추사에게 올렸는데 추사는 서문에서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서 근자에 유일한 종지(一宗, 一眞如宗 유일하고 진실 여여 한 종지)의 율사(律師)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율사라고 쓰는 것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은 백파대사가 여든 해 동안 힘을 쏟은 곳이다. 혹자는 기ㆍ용ㆍ살ㆍ활만을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 깊이 살펴 연구함)할 수 있었다고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무릇 보통사람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고 살활기용(殺活機用)아닌 곳이 없고 팔만의 대장경일지라도 한 가지 법이 살활기용의 밖을 벗어난 것이 없다.

다만 사람들은 이 뜻을 알지도 못하고 망령되게도 살활기용에 백파가 구속되어 집착하고(拘執着相)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가 하루살이(ephemera)가 나무를 흔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이 충분히 백파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백파대사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논변(辨難)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함부로 의논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한 곳은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데 온갖 충고의 말(苦口說)을 한다고 해도 사람 모두가 진리를 깨달아 알지(解悟)를 못할 것이다.

어떡하면 대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마주하고 한번 크게 웃어 볼 수 있을까.

지금 백파의 비면 글자를 지으면서 대기대용의 한 구를 크게 쓰고 두드러지게 적지 않는다면 백파의 빗돌이라고 여기기에는 부족하다.

백암 도원(白巖道圓)ㆍ설두 유형(雪竇有炯,1824~1889) 등 많은 문도들에게 써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했다.

추사는 큰 글씨 한 줄로 “화엄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 지 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써 주었다.

명에 이르기를,

貧無卓錐。가난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氣壓須彌。기상은 수미산도 진압할 만하네.

事親如事佛。부모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 듯하니

家風最眞實。가풍은 가장 진실하구나.

厥名兮亘璇。그 이름이 긍선이라서

不可說轉轉。전전한다고 말할 수는 없도다.

師自賛曰。대사의 자찬 비명은 이러하다.

頭髼鬆兮眼卓朔。머리털은 부스스하고 눈은 툭 불거졌으니

此其老僧眞面目。이게 이 노승의 진면목이라.

上拄天下拄地。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로는 땅 지탱하니

佛祖元來覔不得。부처님도 조사도 원래는 찾았으나 얻은 것이 없었다.

呵呵呵是甚麽。하하하 이게 뭣고

南北東西唯是我。동서남북에 오직 나뿐일세.

선운사에 빗돌을 세우니 빗돌 글은 참판 추사 김정희가 지었다. 영구산 구암사(靈龜山龜巖寺) 설봉 회정(雪峰懷淨)의 사법 제자(嗣法弟子)로 퇴암 태관(退庵泰觀)의 손자 제자이고 설파 상언의 증손 제자이고 호암 체정의 현손 제자이다.

제자로는 구봉(龜峰)ㆍ도봉(道峰)ㆍ정관(定觀)ㆍ백암(白岩)ㆍ영산(影山)ㆍ혜암(惠庵) 등(等)이 있고 문집 4권이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역자 注)

율과 화엄사상과 선의 정수를 두루 갖춘 조선후기 선문의 중흥 주 백파선사의 선맥은 청허휴정 → 편양언기 → 풍담의심 → 월담설제 → 환성지안 → 호암체정 → 설파상언 → 퇴암태관 → 설봉회정 → 백파긍선으로 이어진다. 추사 김정희는 “해동의 달마”라고 칭송했다.

 

❍虛舟禪伯傳

-범해 각안(1820~1896)

師名德眞。號虛舟。夙植善根。幼願出家。投入曹溪。獨守孤節。學成道達。受印行職。退衆樂獨。避人而人來。匿跡而跡露。或住松廣。或住仙岩。或住桐裡七佛。或住佛日楞枷。住白雲。住頭輪。住達摩。道甲之上見性。伽智之內院。白羊之物外。華嚴之九層。燕谷之文殊。龍興之普賢。內藏之圓寂。禪雲之兠率。西方之上雲。雲門金塘華岩安心文殊。皆其住錫處。再遊京山。應雲峴之召。祈祝於鐵原之寶盖。高山之雲門。到處四衆雲集。一食五觀泉湧。不着之衣自至。不食之供並臻。非夙植之善。豈能若是。受戒者。受禪者。受法者。受業者。不論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沙。沙彌沙彌尼。式蹉摩那。信男信女。即從座起。合掌啓請。如在靈山拈華示衆。泣者笑者。皆得寶而歸。信受奉行。然白玉之玷。師之未察。勝己者厭。理之常也。雲蔽日月。日月何損。光緖戊子十月十三日。示寂。禪風遂寥寥。

출전 [東師列傳]第四

❍허주 선백 전

대사의 법명은 덕진(德眞)이고 호는 허주(虛舟)이며 일찌감치 도의 근기를 잘 심어 어려서부터 출가를 서원하다가 조계산으로 뛰어 들어가 홀로 높은 절조를 지키며 중이 되었다. 

학업을 이루어 도에 통달하자 스승으로부터 인신(印信)을 받고 소임을 맡아 대중을 교화하기 시작했다.

허주 대사는 대중을 물리치고 홀로 정진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피했으나 그럴수록 학인(學人)들이 몰려들었으며 자취를 숨기려 하면 할수록 자취가 더욱 드러났다.

혹은 송광사(松廣寺)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선암사(仙岩寺)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동리산(桐裡山) 칠불암(七佛庵)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불일암(佛日庵)과 능가사(楞伽寺)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백운산(白雲山)에 머물다가 해남 두륜산(頭輪山)에 머물기도 하고 해남 달마산(達摩山)에 머물기도 하고 영암 도갑사(道甲寺) 상견성암(上見性庵)ㆍ장흥 가지산(伽智山) 내원암(內院庵)ㆍ장성 백양산(白羊山) 물외암(物外庵)ㆍ구례 화엄사(華嚴寺) 구층탑(九層塔)ㆍ구례 연곡사(燕谷寺) 문수암(文殊庵)ㆍ담양 용흥사(龍興寺) 보현암(普賢庵)ㆍ정읍 내장산 원적암(圓寂庵)ㆍ고창 선운사(禪雲寺) 도솔암(兜率庵)ㆍ완주 서방산 상운암(上雲庵)ㆍ운문사(雲門寺)ㆍ금당사(金塘寺)ㆍ화암사(華巖寺)ㆍ안심사(安心寺)ㆍ문수사(文殊寺) 등이 모두 허주 대사가 주석한 곳이다.

대사는 다시 서울 가까이에 있는 산(京山)에 유람 왔다가 운현궁雲峴宮(흥선대원군)의 부름에 응하여 철원에 있는 보개사(寶蓋寺)와 고산 운문사(雲門寺)에서 대원군을 위하여 기도 축원(祈祝)을 올렸다.

이르는 곳마다 사부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니 오관(五觀)이 샘물 솟아오르듯 하였다. 

옷을 입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공양거리가 다 이르곤 하였으니 이것이 과거 세상에 심은 선근(善根)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계율을 받은 제자와 선법을 받은 제자 그리고 법을 받은 제자와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ㆍ사미ㆍ사미니ㆍ식차마나(式叉摩那)ㆍ신남(信男)ㆍ신녀(信女)를 불문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모습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께서 꽃을 집어 들어 대중들에게 보이는 그 모습과 같았다.

설법을 마치면 우는 이도 있고 웃는 이도 있었으며 모두가 보배를 얻어 돌아가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하였다(信受奉行).

그러나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으니 대사는 자신보다 나은 이를 싫어하는 것(勝己者厭)이 당연한 이치임을 살피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름이 해와 달을 가린다 해도 해와 달이 무슨 손상을 입겠는가.

광서(光緖) 무자년(고종25년1888) 시월 열 사흗날 시적(示寂)하였다. 그가 입적하자 한창 떨치던 선풍(禪風)도 마침내 쇠잔해 가기 시작하였다.

注)

五觀 - 처음에는 자신의 공덕이 많고 적은지를 생각하고 그 약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둘은 자신이 덕을 베푼 것이 마땅히 공양 받기에 온전한지 부족한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은 마음을 잘 방비하여 허물이나 탐욕 등을 여의는 것이 근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은 바른 일은 몸의 괴로움을 다스리는 좋은 약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은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初計功多少量藥來處。二自知行德全缺應供。三防心離過貪等爲宗。四正事良藥爲療形苦。五爲成道業)

式叉摩那(식차마나) - 미성년으로 출가한 여자가 성년이 되면 정식 비구니가 되기 위해 2년간 수행을 하는데 그 기간 동안의 여자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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