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문병길/장흥군 문화관광해설사협회 회장

Ⅰ. 팔진도(八陣圖) 병법(兵法) 실천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2~

1571)선생은 큰 인물로 키우고자 문위세를 13세부터 학문을 34세까지 안동 도산서원에서 『주자전서(走者全書)』 가르침을 직접 가르쳤다. 특히, 문위세 나이 27세에 팔진도(八陳圖)에 대해 설명한 다음 그 해설서를 베끼게 하면서 “이 역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단(一端)이니 독서하는 여가에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연구하라.”고 말했다.

성리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경전(經典)이 아닌 병법을 격물치지(사물의 위치를 연구해 앎에 이름)하도록 하였던 것은 임진왜란 때 국란을 극복하려는 유학자로서 의병을 모집해 제갈공명의 팔진도를 전투실전에서 응용한 것이 특이하다.

▶팔진도는 제갈공명이 주역 팔괘(八卦)의 방위에 의해 만든 「군사조련 용병술」로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의병장이 되어 왜군과 싸울 때 큰 힘이 되었다. 

임진창의록(壬辰倡義日記) 기록에 의하면 문위세는 1592년 7월 1일 장흥, 강진, 해남, 영암선비에게 창의통문(倡義通文)을 보낸 뒤 두 형님(위천, 위지)과 함께 청영정(淸潁亭,현재 부춘정)에서 의병 일으킬 것을 논의한 뒤 큰 아들 문원개(文元凱)로 하여금 집안 노복(奴僕)100여명을 동원하게 하고 군량을 모으는 한편, 강진출신 이충량(李忠良)을 자신의 부장(副將)으로 삼아 향병조직을 갖춘 뒤에 보성에서 거주하고 있는 자형 박광전과 의논하여 보성 임계영 등과 협조체제를 구축했다.

Ⅱ. 의병운동에 뛰어든 일가창의(一家倡義)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등재된 전라좌의병장 동 창제공(全羅左義兵將 同 倡諸公) 즉 전라좌의병 지도층 인사들은 의병장 임계영을 포함하여 모두 21명이다. 출신지역별로 살펴보면 장흥 10명, 보성 9명, 강진.흥양(고흥) 각각 1명인데 보성 박광전과 박근효(박광전의 장남)는 문위세 매형이자 고종간(박근효)이여서 일가친척이다.

장흥 출신 10명 가운데 남평문씨 집안사람이 6명 차지하고 있으며, 문위세 사위 백민수(1577~1615)를 포함하면 7명이다.

▶풍암 문위세를 주축으로 한 남평문씨 일가 5부자와 조카, 사위가 모두 의병운동에 뛰어든 일가창의(一家倡義)의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문위세와 함께 전라좌의병 지도층을 형성한 임계영(任啓英)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진보현감(珍寶縣監, 전북 임실)을 지낸 전직관리로서 도내에 이름난 인물이었다. 특히 왕자사부(師父)였던 박광전은 문위세 자형이니 전라좌의병을 봉기함에 있어서 처남과 자형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으며, 두 사람의 협력관계가 의병활동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Ⅲ. 맺는 말

▶풍암 문위세는 문익점 선생 9대 손이며, 기묘명현 귤정 윤구 생질이여서 전통 사림파 가문 인물이었다.

귤정 윤구, 미암 유희춘, 퇴계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아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한 과거지학(科擧之學)보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인 도학자(道學者)였으며, 스승에게 이어받은 투철한 선비정신은 평생 그의 정신적 지저로 작용하여 임진왜란 의병운동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장흥도호부를 대표하는 문위세 의병활동은 전라좌의병 지휘부 핵심인물로 참여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그래서 남평문씨 일가 6부자와 조카, 자형, 사위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일어난 전형적인 일문창의(一門倡義)라는 점에서 차별화 되며, 문위세와 함께 그의 아들 문영개, 문형개, 문홍개, 문여개, 사위 백민수, 조카 문희개는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등재되었다.

1798년(고종35)에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유생 임오원(任伍源) 등 600여명 상소하여 풍암 문위세를 병조참판 증직이 하사되었고, 부조묘(父?廟:공적이 탁월한 신하에게 국가에서 사당에 영구히 제사모시도록 허락하는 것)를 허락하여 지금도 매년 10월 4일 향사해 오고 있다.

 

▶그리고 장흥도호부를 대표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문위세 의병활동은 의병의 군량조달은 물론 관군의 군량까지 공급하는 일에 천신만고의 고난을 다하였다.

비정규군인 의병활동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가징 중요한 문제가 바로 군량확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장기화 되고 흉년이 거듭된 당시의 실정에서 볼 때 의곡 지원 및 전지운송에 집중된 문위세 의병활동은 실전의 전투 활동에 못지않게 높이 평가 되어야 할 업적이라 하겠다.

▶전라좌도 남부지역 사림이 주축이 되어 처음에는 전라좌의병 양향관으로 뒤에는 호남운량관으로서 호남지방에서 모은 곡식을 영남지방으로 수송하여 의병군량을 공급하는 한편,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했던 전라도 관군의 군량미와 군사를 지원하는 책임까지 직접 맡았다.

향토방위가 아닌 국란극복차원에서 성군된 전라좌의병의 전공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향후 『의향 장흥』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향(義鄕)」은 인간의 존엄과 생명존중의 기틀이 되는 정신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라좌의병이 경상도 성수성 수복 전투를 1592년 12월 12일에 승리로 이끌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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