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先大師諱守初 字太昏 翠微其號 成姓 系出昌寧 本朝名臣三問之旁裔也 萬曆庚寅六月初三 生于京城頖宮之北 娠夕之夢 誕旦之瑞 不無而可略也 爲兒嬉戱 則必爲佛事已 則傲兀而坐 凷然如入定僧 見者咸異之曰非是塵臼中人 賦鷗之歲 喪考妣 唯兄嫂是依 及志學 唾財賄尙倜儻 一夕薦枕 形未及交 怳然有梵僧疾嘑曰來何遲 如是者再 急起坐 遲明告兄以所夢 求出家 即以手窒口曰 勿復出此語橽矣 嘿然而退 不樂者數日才浹旬晨夜 便踰城走 依雪嶽耆宿敬軒 落䰂擁毳 丙午南抵頭流 首謁浮休 具尸羅執巾匜 侍左右時 碧嵓師翁 以小長老 居第一座 一日休摩師會撮 而謂第一座曰 異日大吾道者必此沙彌 吾耄且疾 非久於世 以付汝 好自將護其器重 如此旣勝冠 遍踏區宇 叩叅宿匠 所至法席 莫不操戈 嘗歎曰 古之抱德行道者 率皆漁獵他宗異學 對儒談儒 逢老談老 禦其侮誚 俾昌熾佛聖之化 豈若今之蓬心墻面者哉 即返京輦 出入翰相之門師友貴游薦紳 討論墳典 咀嚼菁華進之無已 寓一庵宿 有靑衿四五軰以癯烏爲韻 請賦詩 師立吟其末句云平生無長物 唯有竹枝烏 時稱竹枝烏僧云 會碧嵓轉化關東 師忽心語曰 夫零染之士 醉心祖道爲樂 何一向寓目於俗典耶 荷楖標徑造 而値其陞座即遶牀三匝展坐 具設禮儗問訊 嵓曰何處得一擔紝婆子來 師曰欲放下無着處 嵓曰卸後相見 師擺袖歸寮 嵓以休之囑 密指顯諭 縱橫激發 師心冥意會 箭鋒交拄 旣象駕南旋 師隨御而歸 陪侍積稔 芟其枿拔其樁 洞啓關鍵 深入淵玄 嵓印之曰 宗門準的是時無染熏 公以敎場傑魁 八表義學風趍駿奔 橫經問難 師又禮事之 益精練契經奧義 自是禪兼頓漸 敎會性相 且經史子集 該綜慱究 綽有餘裕師出一言若崩 厥角罔不靡 然趍下風矣 至於師資激敭 或能批頰捋鬚 此非中容下士所能擬議故 多以爲大甚逕莛 不近常情 若臨濟之於黃蘗焉 陸沉于衆有年 崇禎己巳 衆請出世 乃開堂于玉川之靈鷲 學徒臻湊 時相國張公維 命希古上人 結社於北山 嚮師道風 屢以折簡請 師重席 牢讓不赴 益重之 遺以璖數珠一串 壬申被請抵關北 唱道於悟道雪峰諸山 道聲遐布 四來玄侶 坌然畢萃 法席蔚然大振嶺外 禪學之盛 自此始居無何欲航游海西 諮決餘疑 遂結同志四人擔簦而邁 至陽德時 値逮夷東躪路梗不得達 丁丑東之太白經一白 明年南還 省碧嵓 嵓方罷義旅 歸方丈舊栖 尋闡化於雞足之㝎慧 白雲之龍門癸未晉牧李公昭漢 請移七佛 衆盈三百 接人治己 昒昕匪懈 姜公大遂 繼涖玆邦 累入社談論 必移日玄言 舋舋注瀉 無竭莞然 奇之曰 眞僧中杞梓也 壬辰自長之珍原 回錫智異 適李公之蘊 出守龍城 迎入州郭 留數日頗味高論曰 禪學高明 於師見矣 常字而不名 

◆취미대사 행장

돌아가신 대사의 휘는 수초(守初)이고 자는 태혼(太昏)이며 취미(翠微)는 그의 법호이다. 성(姓)은 성씨(成氏)로 선계는 창녕(昌寧)에서 나왔고 본조 명신(名臣) 삼문(三問)의 방예(旁裔, 傍孫)이다.

만력 경인년(선조23년1590) 유월 초사흘 날 경성(京城) 반궁(頖宮, 제후국의 태학, 성균관)의 북쪽에서 태어났다.

임신한 날 저녁 꿈 이야기와 태어난 날 아침 상서로운 이야기는 없지 않으나 생략한다.

어릴 적 장난치고 놀 때면 반드시 불사(佛事) 놀이를 일삼았을 뿐만이 아니라 꼿꼿하게 앉아서 흙덩이인 양 입정에 든 승려처럼 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속세에서 사는 사람(塵臼中人)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부구(賦鷗, 7~13세)의 연령에 부모를 여의고 오직 형수에 의지하여 살아가다 열다섯 살이 되자 재물(財賄)에 침을 뱉고 큰 기개(倜儻)를 숭상하였다.

어느 날 저녁 잠자리를 펴고 자리에 누워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황망하게 어떤 범승(梵僧)이 급하게 부르며 말하기를, “찾아오는 것이 왜 이리 늦었는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되자 급하게 일어나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형에게 꿈꾼 이야기를 하며 출가하기를 청하자 바로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말라”고 하였다.

입을 다문 채 말없이 물러났으나 며칠 동안이나 마음이 편치 않자 겨우 열흘이 지난 새벽 밤에 곧바로 성을 넘어 달아나 설악산의 학덕이 있는 연장자(耆宿) 제월당 경헌대사(霽月堂敬軒大師,1544~1633. 천관산 명승)에게 의탁하여 삭발하고 승인이 나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병오년(선조39년1606) 남쪽 두류산(지리산)에 이르러 먼저 부휴 선수대사를 참알하고 계율(尸羅)을 갖추어 제자가 되었다(執巾匜).

곁에서 모실 적에는 벽암사옹(碧嵓師翁)이 소 장로(小長老)로서 제일 좌(第一座)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루는 부휴대사가 대사의 목뼈(會撮)를 쓰다듬으며 제일 좌에게 일러 말하기를, “후일 나의 도를 성대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미일 것이다. 나는 늙어빠지고 병까지 들어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자신을 잘 보호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부휴대사가 대사의 그릇을 귀중하게 여긴 것은 이와 같았다.

승관(勝冠, 弱冠 20세)이 되고 나서 온 누리(區宇)를 두루 답사하며 노사숙장(老師宿匠)의 문을 두드리고 참방(參訪)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법석에서 창을 들지(操戈) 않은 적이 없었다.

항상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덕을 품고 도를 행하는 자들은 거의 모두가 타 종교와 다른 학술 백가를 섭렵(漁獵百家)하여 유학자를 만나면 유학을 담론하고 노장을 만나면 노장을 담론하였다.

그리하여 불교를 경멸하고 꾸짖지 못하게 하여 부처(佛聖)의 교화를 번창시키고 치성하게 하였으니 어찌 지금처럼 마음이 굽어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같았겠는가.”라고 하였다.

대사는 곧바로 한양(京輦)으로 돌아와 문인 학사의 문을 출입하며 귀족들과 조정의 신하들을 사우(師友)로 삼아 삼분오전(三墳五典, 三皇五帝 시대의 책)을 토론하고 정화(菁華, 精髓)를 음미하며 정진(精進)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암자에 머무르고 있을 적에 어떤 유생(靑衿) 네다섯 사람이 “구오(癯烏)”를 운(韻)으로 삼아 시 짓기를 청하니 대사가 바로 읊었는데 그 말구에 이르기를, “평생 오래도록 챙길 물건은 없고 오직 까만 대지팡이만 있구나(平生無長物 唯有竹枝烏).”라고 하자 당시 사람들이 “죽지오 승(竹枝烏僧)”이라고 불렀다.

때마침 벽암대사가 관동(關東)지방에서 교화를 펼치고 있었는데 대사가 갑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말하기를, “대저 물들인 옷을 입은 사람이 되었으면 조사의 도에 심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속가의 경전에만 한결같이 눈길을 돌려야 되겠는가.”하고는 주장자를 어깨에 메고 조금도 한눈팔지 않고 곧장 산속으로 들어갔다.

벽암을 만나 법좌에 오르자 즉시 법상을 에워싸 세 번 돌고 나서 좌구를 펼치고 예법대로 인사한 뒤에 안부를 물으려 하자 벽암대사가 말하기를, “어느 곳에서 임파 열매 씨 보따리 하나를 메고 왔는가(何處得一擔紝婆子來).”라고 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집착하는 곳이 없는데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欲放下無着處).”라고 하자, 벽암대사가 말하기를, “짐을 풀고 난 뒤에 보도록 하자(卸後相見).”라고 하였다.

대사가 옷소매를 흔들며 요사채로 돌아가니 벽암대사는 부휴선수대사의 부탁 때문에 밀지(密指, 방편으로 은밀히 설한 것)와 현유(顯諭, 드러내어 깨우침)로써 종횡으로 격발시키자 대사는 마음과 뜻으로 그윽이 회통(冥會)하여 화살과 칼날이 엇갈리게 버티고 서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벽암의 수레가 남쪽을 선회하자 대사가 따라가서 맞이하고 돌아와 많은 해를 받들어 모시고 마음속의 성한 그루터기를 베어내고 빗장과 자물쇠를 활짝 열어젖혀 심오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벽암대사가 인가하며 말하기를, “종문의 기준과 표적(準的)”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무염훈 공(無染熏公)이 교학으로 도량에서 우뚝 하자 전국의 의학 승(義學僧)들이 다투어 몰려들고 분주하게 달려와서 경전을 펼치고 토론을 벌이자 대사도 또 그를 예로써 모시면서 더욱 정밀하게 연마하여 경전의 심오한 뜻에 계합하였다.

이로부터 선(禪)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겸하고 교(敎)는 성(性)과 상(相)을 회통(會通)하였으며 게다가 경사자집(經史子集)도 갖추어 통괄하고 넓게 궁구하여 여유작작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사가 한번 말하면 마치 짐승의 뿔이 부러졌을 때와 같이(若崩厥角) 모두가 쓰러지며 그를 높이 우러렀다.

사제 간을 격양(激敭)시키는데 이르면 간혹 뺨을 때리고 수염도 뽑을 수 있지만 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계의 범부(中容下士)가 헤아려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제(臨濟)와 황벽(黃蘗)의 관계처럼 대부분 너무나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서 보통 인정(常情)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몇 년 동안 대중 속에 은거하다 숭정 기사년(인조7년1629)에 대중의 요청으로 세상에 나와 마침내 옥천(玉川)의 영축사(靈鷲寺)에서 가르침을 펴니 학도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상국(相國) 장공 유(張公維)가 희고 상인(希古上人)에게 북한산에서 결사(結社)를 조직할 것을 명하고 나서 대사의 도풍(道風)을 숭배하여 자주 서간(折簡)을 보내 청하며 대사를 존경(重席)하였으나 굳게 사양하며 나아가지를 않자 더욱 귀중하게 여기며 자거(璖, 옥돌) 한 꿰미 염주 알(數珠一串)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임신년(인조10년1632)에 요청을 받고 관북(關北)지방에 이르러 오도산과 설봉산 등 여러 산에서 앞장서서 불도를 주창하자 도가 높다는 명성이 멀리까지 퍼져 사방의 승려들이 분연히 모두 모여들어 법석은 성대하고 저 산 너머(嶺外)까지 크게 진동시켰으니 선학(禪學)이 창성해진 것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居無何) 해서(海西)지방을 유람(航游)하여 남은 의심을 자문 받으려고(諮決餘疑) 마침내 동지 네 사람과 모임을 결성하고는 자루가 긴 우산을 메고(擔簦) 길을 떠났으나 평안도 양덕(陽德)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가 해동의 길을 짓밟고 막는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14년1636)을 만나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축년(인조15년1637)에 동쪽 태백산으로 가서 일백(一白)을 경유하여 다음 해 남쪽으로 돌아와 벽암대사를 찾아가 안부를 물으니 벽암대사는 그때 바로 승병 군사(義旅)를 해산시킨 뒤였다.

방장산 옛날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계족산의 정혜사와 백운산의 용문사에서 교화를 펼쳤다.

계미년(인조21년1643)에 진주목사 이공 소한(李公昭漢)이 칠불암(七佛庵)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대중 삼백 명이 꽉 들어찼는데 사람들을 대할 때는 우선 자신을 먼저 다스렸고 새벽 아침에도 게으름을 피지 않았다.

강공 대수(姜公大遂)가 이 고을에 연이어 부임하여 자주 선사(禪社)에 들어와 담론하면 필경 현묘한 말로 해가 기울었는데도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면서 끝없이 유창하자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참으로 승려 중에 기재(杞梓, 걸출한 인물)로구나.”라고 하였다.

임진년(효종3년1652)에 장성 진원으로부터 지리산으로 돌아와 주석하였는데 마침 이공 지온(李公之蘊)이 남원 도호부사로 나왔다가(出守龍城) 고을 외성에서 대사를 맞아들여 수일을 머물렀는데 이공이 자못 고상한 의론을 음미하며 말하기를, “선학의 고명함(禪學高明)을 대사에게서 보았다.”라고 하고는 항상 자를 불렀지 이름은 부르지를 않았다(常字而不名).

▲승보종찰송광사불일문
▲승보종찰송광사불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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