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흥동학 전사자 1,510명이 새롭게 확인돼 장흥동학사가 새로 쓰여지게 됐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해 말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집>에서 밝혀졌다.

그동안 장흥동학혁명 관련 사망자는 70여명에 불과했으며, 참전자도 40명 이상을 밝혀내지 못해 동학 최후격전지로서의 역사적 위상 정립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돼 왔다.
<천도교 장흥군종리원 연혁>에서는 장흥동학 전투과정과 토벌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의 기록이 사망 44명, 참전자 46명이었고, 박맹수의 <장흥지방 동학농 민혁명사>(1992년)에서도 장흥-강진전투에 참여한 장흥 강진 화순 농민군이 김방서를 포함해 사망자는 70명, 참전자도 33명에 불과, 그동안 장흥동학농민군 희생자나 참여자는 기록상으로 모두 1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 기념사업회가 사료집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동학역사 자료집으로 전혀 검토되지 못한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를 입수해 변역, 편집하는 과정에서 사망자 345명의 명단과 참전자 135명의 명단을 확보했고, 무명 전사자도 401명을 찾아냈으며, 기타 기록까지 종합한 결과 무명 전사자가 모두 1,165명이나 되어 동학혁명 전사자 총 1,510명을 새롭게 확인하게 됐다.


이로써 장흥동학군 전사사는 모두 1천6백여 명에 이르게 되어, 그동안 장흥동학농민혁명 때 수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전해져온 구전이 전혀 허위가 아님이 밝혀졌다.


장흥동학사에 새로운 사실을 제공한 <양호우선봉일기>는 당시 동학군 토벌대장으로 경기도에서 전라도까지의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가한 이두황대장의 진중일기다. 일기는 1894년 9월 10일부터 1895년 1월 18일까지 쓰여진 일기체 기록으로 총4권(418쪽)으로 구성돼 있으며, 장흥관련 기록은 225쪽부터 393쪽까지 고루 분포해 있는데, 이번 발간된 기념사업회가 출간한 사료집에서 이 부분이 요약되어 게재되었다.


이 일기는 천도교 장흥교구장인 김동철씨가 서울에서 우연히 발견, 장흥기록 부분을 복사, 기념사업회에 제공했고 기념사업회는 이를 위의환씨에게 번역을 의뢰, 기념사료집에 편집해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장흥동학사를 조명하는데 있어, 사망자 및 참여자에 대한 기록의 취약성과 함께 석대전투 이후 농민군 진압에 대한 진압기록의 빈약성은 큰 장애요인이 돼 왔다. 그러나 이번 <양호우선봉일기>로 인해 상당수의 동학혁명 전사자 숫자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일기가 12월 20일 이후 농민군 진압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어 그동안 많은 부문에서 미진했던 장흥동학사를 새롭게 조명하는데 크게 기여를 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해 말 장흥동학농민 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장흥동학농민 혁명 사료집(이하 사료집>은 뒤늦게나마 장흥동학농민 혁명사를 제대로 조명해 발간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4×6배판/594쪽으로 발간된 이번 사료집은, 사료집 발간에 대한 지원금(7백만원)의 한계로, 표지 장정이나 편집 등에서 다소 미흡해 보이는 흠이 있긴 하지만, 내용면에서는 그동안 발표된 동학관련 글과 논문 등을 집대성했고, 특히 그동안 장흥동학 조명에 걸림돌이 됐던 사망자에 대한 기록이나 석대전투 이후 농민군 진압에 대한 기록의 부족을 보완해줄 수 있는 <양호우선봉일기>의 발굴 게재로 장흥동학 혁명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이번 발간된 사료집은 그동안 발간되거나 발표된 장흥동학 관련 책자 중 가장 완벽한 사료집으로 평가될 만하다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장흥동학사를 다시 새로 쓰게 한 <양호우선봉일기> 중 1~3권(1894.9.10~1894.12,30)은 그동안 고려대학교와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었고, 4권(1895.1.1~2.18)은 윤사순교수가 소장하는 등 분리돼 있다가 지난 1996년 역사문제연구소의 ‘동학혁명 100주년기념사업회추진위원회’에 의해 <동학전쟁사료 총서> 30권이 영인 발간되면서 합권되어 제15권으로 발간(史芸연구소 간) 됐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일기는 장흥동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가 이번에 우연히 김동철 천도교 장흥교구장에게 발견되어 기념사업회가 번역, 사료집에 편집해 넣게 된 것이다.


위의환씨에 의하면, 이두황은 장흥석대전투 이후인 12월 20일 장흥에 입성하여 이듬해인 1월 8일까지 18일간 장흥동문밖에 주둔하며 장흥동학농민군을 토벌했던 동학군 토벌대의 하나인 우선봉장으로, 대표적인 친일인사. 당시 이두환의 우선봉 부대는 총 715명의 장졸로 구성됐으며, 그들은 장흥에 입성한 후 살인과 약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수많은 농민군을 색출 처형했는데, 그러한 이두황의 진중일기가 112년이 지난 오늘날 장흥 동학사를 다시 쓰게 한 동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두황 일기는 당시 토벌군의 잔학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두황의 직속부대인 우선봉군은 농민군에 대해 독자적인 현지의 즉시 처결권을 가지고 있어 체포과정에서 많은 농민군들을 즉살시켰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처럼 즉살된 농민군의 명단이나 숫자는 일기에 전혀 반영하지 않아, 일기에 나타난 사상자 명단이나 참살된 숫자 외에도 훨씬 많은 숫자의 농민군이 사살됐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또 그동안 회진면 덕도에는 5,6백 명의 농민군이 대피해 들어갔으며, 이들 중 한 사람도 잡히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회자되었는데, 일기에도 덕도(회진면의 덕산, 장산, 신상, 대리)에 실제로 농민군 5,6백 명이 토벌대를 피해 들어갔고, 우선봉부대가 이를 추격하여 토벌하려 했지만 덕도에서 한 명의 농민군을 체포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일기는 덕도 섬사람들이 서로 定約하여 섬으로 피신해 온 농민군을 다른 여러 섬으로 빼돌리고 반대로 토벌군을 거짓으로 따 돌렸다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토벌군에 대한 민심의 한 단면을 읽게 하고 있다.
또, 일기에는 당시 토벌군의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 극심했음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다. 한 일본군 소위가 순무영에 전해준 첩보 내용에서는 ‘이두황이 인솔한 조선병정들이 동학에 입도하지 않은 양민의 집집마다 돌며 빼앗은 소가 50마리나 되었고 그밖에도 의복, 돈, 곡식, 그릇, 쇠로 만든 온갖 그릇 등을 빼앗아 양민들은 돈과 곡식을 동학도에게 뻬앗기고 얼마되지 않게 남은 것은 경군(토벌군)에게 또 빼앗겨 추위와 굶주림이 심해 불쌍하기 짝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토벌군의 양민에 대한 약탈상은, 이 일기에서도 위계철 등 장흥유생들이 보다 못해 그들의 살생과 약탈을 비판하고 탄핵할 정도였다.


또 일기에는, 이방언 장군을 잡은 이는 남상면 거주 백인중(白寅重)이고, 우선봉군대가 이 백씨에게 백미 5석, 남상면 집강에 백미 5석, 힘을 합쳐 이방언을 체포한 마을주민 40명에게 전 1백냥을 시상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일기에는 여자 동학도를 체포,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물들만 압송하는 일본대대가 있는 나주압송자로 분류되어 나주로 압송해 가는 대목도 나온다. 또 이 여동학도에 대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되도록 매를 맞고 문초를 당해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장흥 인민이 체포한 여동학이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고 쏟아내고…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大妖物)이라…”라는 기록도 있어, 이 여동학도의 위상을 새삼 짐작케 하고 있다.


번역자 위의환씨는, 이 여동학도가 <장흥군지>나 송기숙의 <역사와 현장> 등에서 장흥동학혁명 때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여장부 이소사(李召史)’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이번에 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집>은 그동안 장흥동학 혁명사에서 미진했던 여러 가지 부분을 보완할 수 있어 장흥동학 혁명사를

다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사료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사료집 발간에 깊숙이 참여하며 이두황 일기의 번역과 해제는 물론 장흥동학 혁명사를 새롭게 보완해 장흥동학혁명사를 기술했던 위의환씨는 “이번 사료집 발간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수확은 이두황 우선봉일기의 입수, 번역과 게재였다”면서 “그러나 보다 완전한 장흥동학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선봉브대와 함께 장흥동학에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좌선봉부대의 진중일기도 번역해, 그 사료도 확보하는 길”이라면서 “이 작업도 하루빨리 추진되어 장흥동학 혁명사가 명쾌하게 조명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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