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땅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고인돌을 보면, 그러니까 까마득한 기원전 2500∼1000년경에 축조되었을 고인돌을 보노라면, 청동기 시대 장흥 땅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전라남도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장흥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인돌이 장흥 땅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장흥 지역이 최적의 삶의 환경을 지닌 땅이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다.

그로부터 5천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두루 살펴봐도, 장흥의 자연·생태환경은 선사시대의 농경과 수렵, 어로활동이 유일한 생활양식이었을 시절에는 가장 경쟁력이 강한 땅이었음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가죽옷을 입고, 사냥과 채집을 하며, 동굴이나 막집 생활을 하던 그 시절, 짐승이 많은 깊고 큰 산과 고기가 풍부한 큰 강과 바다는 첫째가는 삶의 유일한 수단이요 생활조건이었을 것이다.

2개 읍과 3개 면을 연한 득량만은 관두더라도, 장흥의 산하는 경이로울 정도다. 남해에 연한 지역으로서 500m봉 이상의 산이 무려 13개나 된다. 한반도 남부 영호남에서 이런 높은 산들이 산재한 곳은 장흥이 유일하다. 제암산(807), 천관산(723), 사자산(666), 삼비산(664.2), 국사봉(613), 부용산(609), 수인산(561), 용두산(551), 억불산(518), 가지산(515), 천태산(549.4), 봉미산(506), 삼계봉(504) 등이 그렇다. 이를 타 지역과 비교하면 더욱 확연해진다. 군 경계의산을 포함하더라도 강진은 월출산(809)과 수인산·천태산 3개에 불과하며, 보성은 제암산 · 일림산 2 개, 해남은 두륜산(703)·가학산(577)·흑석산(564) 3개, 고흥과 영암은 각각 팔영산(609)과 월출산 1개에 지나지 않는다.

산이 깊으면 계곡도 깊고 종내는 큰 강도 만들어낸다. 장흥의 북서로는 탐진강이, 동북으로는 보성강 지류가 흐르고 남부로는 수문천·남대천이 흐르며 장흥의 땅을 기름지게 해왔다.

여기에 온화한 기후와 맑은 공기, 기름진 들녘이 천혜의 자연조건을 만들어, 수많은 선사인(先史人)들이 이러한 장흥의 산과 강과 바다를 이웃하고 살기 위해 장흥으로 장흥으로 모여들었을 터이고, 바로 이러한 흔적들이 장흥의 고인돌이다.

더구나 이러한 장흥의 자연·생태환경은 옛날 사람들이 무리지어 세속을 잊고 숨어사는 데도 최적의 환경을 제공, 장흥에 성씨 본관들이 많아지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상고(上古) 때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의 문물제도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나주 다음으로 본관이 많은 곳이 장흥이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장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임(任)·마(馬)·위(魏)·고(高)씨 등 주요 4개 토성(土姓) 외에도 장흥본관의 성씨가 오씨(吳)를 비롯하여 정(鄭)·조(曺)·주(周)·김(金)·임(林)씨 등 6개나 있었다. 또한 장흥본관 외에도 인천(이씨)·영광(김씨)·남평(문씨) 등에서 분파 되어 장흥에서 집성, 세거(世居)한 성씨도 많아 장흥은 과히 '성씨의 고을'이라 할 만했다.

인근 지역들 곧 보성·강진·고흥·해남·화순·영암 등지에서 토성이나 본관을 합해 봐야 고작 2∼4개에 불과한 사실을 보면, 장흥본관 등 장흥 많은 성씨들의 장흥에서의 세거한 내역을 능히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고려 중기부터 장흥이 지부사로 승격되며 조선조 말까지 7백여년 간 호남 서남부의 중추적인 고을이 된 게 토성이나 본관들이 성세하게 된 원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되기도 하지만, 알려지다 시피 임(任)·위(魏)·김(金)씨 등은 그 이전부터 장흥의 토성으로서 세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이러한 장흥 토성들의 번성은 장흥의 지정학적, 자연 친화적인 환경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왜 장흥이 문림(文林)의 고을로, 의향(義鄕)으로 불리는가. 조선조 가사문학에서, 가사문학의 고을로 불리는 담양보다 더 많은 문인·문사(文士)들이 장흥에서 배출되었다. 또 탐진강을 중심으로 정자문화가 유달리 발달했던 고을도 장흥이었다. 또한 임진난·정유재란·병자호란 등 국난을 맞아 창의하고 의병에 참가했던 충의 정신과 철종조 장흥민란과 갑오동학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의로운 정신이 그 어느 곳보다 활기 있게 구비쳐 왔던 곳도 장흥이었다.

이 역시 장흥이 부사고을이라는 정치적인 환경에서 보다 큰 동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동인을 보탠다면 장흥의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오늘날 '바다의 작가' 한승원씨가 득량만의 바다에서 살았던 원초적인 체험을 가졌기에 바다를 소재로 한 그 많은 명작들을 창작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수많은 문사·선비들이 탐진강이 있고 그 많은 유려한 풍광의 정자들이 곳곳에 있었기에 그곳에서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고 시를 짓고 문장을 엮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에서 지혜를 배우고 산에서 인(仁)을 배운다고 했다(원전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 智者樂水 仁者樂山-論語 雍也편-). 장흥 사람들은, 조선조 장흥의 선비들은 그 탐진강에서, 그 높은 제암산이며 천관산에서, 그 끓며 넘치는 남해 바다에서 삶의 지혜와 덕성을 배우고, 그 산수의 조화 속에서 문학을 태동시키고 위대한 충의의 가치를 체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랜 과거 선사인들을 이러한 장흥의 산하가 좋아 장흥을 찬양하며 장흥에서 당시 지상 최고의 명예였을 고인돌 무덤을 만들며 장흥에서 오래도록 살았던 것이다. 또 광활한 중화대륙에서 피난 차 황해를 건너 온 중국의 선인들은 장흥에서 세거, 장흥인으로서 당당하고 명예롭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후인들은 이 장흥 땅에 문림의 고을, 의향의 고을이라는 명예로운 전통을 만들고 남겨 왔던 것이다.

<장흥신문/제291호/200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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