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씨의 연원은 신라 왕계를 이은 박석김(朴昔金)의 3성과 6부촌장의 성인 이(李, 反梁部), 정(鄭, 沙梁部), 손(孫, 漸梁部) 최(崔, 本彼部), 배(裵,漢岐部), 벽(벽, 習比部) 등 6성에서 시작된다. 물론 백제, 고구려국에서도 성씨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아쉽게도 현존의 성으로 남아있지 않아, 우리나라 성씨의 출발은 신라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이러한 성씨들은 당연히 당대 귀족신분으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거주, 변방의 장흥지역에는 성씨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만, 중국 당나라에서 건너온 귀화씨족으로 단일본의 성씨인 장흥 위씨(魏氏)가 신라 말엽에 건너온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후손들이 신라 말부터 장흥지역에서 토호세력으로서 기세(起世), 성세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씨의 시조는 중국인 위경(魏鏡)이다. 그는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晋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이었다. 위경의 동래설은 4가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라 제27대 선덕왕(재위 632∼647)이 638년 당나라 태종(재위 627∼649)에게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태종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 魏·房·洪·陸·奇·殷·吉·奉) 중 한 사람으로 신라국으로 건너왔다는 설과 당 태종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신라로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최근 장흥위씨 측에서는 위경의 8학사 동래설을 공인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경의 신라 입국의 시기도 당태종 12년, 선덕여왕 7년인 638년이 된다.

이렇게 신라로 건너온 위경은 신라에서 아찬(阿飡)을 역임하고 후에(고려 충렬왕대)에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진다.

회주군 이후의 위씨 세계는 고려 초에 '대각(大覺)한 분으로 관(官)은 시중(侍中)이었던 (大覺官侍中)' 창주(魏菖珠)를 1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여기서 위씨들은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시조인 위경과 1세조 위창주 사이의 300여년을 실계(失系)로 인정하고 있다. 3백년 실계로 인해, 위씨 세계상에는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위씨 인물로 보이는 인물이 몇 사람 나온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진성여왕 때 국내 문학사상 최초의 향가집(鄕歌集)인<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위홍(魏弘 ?∼888)을 비롯, 828년(흥덕왕 3) 약관의 나이로 고성태수가 되고 중원대윤(中原大尹)·무주도독(武州都督)을 역임하였던 위흔(魏昕. 808- 885), 그리고 신라 말엽의 사람으로 경주의 주장(州長)이었던 위영(魏英)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한때 위씨 측에서도 이들을 위씨 방조(傍祖)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본래의 성씨가 김씨들로 밝혀지면서 장흥위씨와 아무 관련 없는 인물인 것으로 정리돼 가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 은 신라 하대 장흥지역에서 천관산 일대의 화엄신앙이나 보림사 등 불교세력, 그리고 당시 청해진의 장보고 세력의 후원으로 곧잘 장흥임씨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장흥임씨의 경우, 시조로 알려진 임호(任灝)가 대체로 고려 초기 정종(재위 946∼949) 연간에 우리나라에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므로, 신라 하대에 장흥지역 토호세력으로 거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장흥위씨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위경이 철저한 신분사회로 6두품 귀족들만 오를 수 있는 ‘아찬’에 오르는 등, 경주에서 인정받는 '귀화 귀족‘으로 행세했을 것으로 미루어, 그들 후손들도 경주에서 '귀화귀족 세력'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씨족보 등 관련 문헌 등에는, 위경이 아찬을 역임하고 '회주(懷州)의 군(君)으로' 봉해져 위씨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여 장흥에서 정착하였다'는 식으로 설명되면서, 신라 말부터 위씨들이 장흥에서 살았을 것으로 알아 왔는데, 이것은 후에 부회되는 과정에서의 오기로 파악된다.

'장흥'이라는 지명도 고려 인종대 이후에 나타난 지명이거니와, 특히 장흥과 관련된 '회주'는 역사상 고려 원종 때(1265년 원종 6), 장흥부가 '회주목'으로 승격되면서 나타난 지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경이 '회주군(懷州君)'으로 봉해졌다면, 아마 고려조 원종대(재위 1259∼1274)이거나, 원종 다음의 왕인 충렬왕(재위 1274∼1308)때인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위씨 측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위경이 회주군으로 추봉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신라 말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최치원도,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듯이, 역사상 유명인물의 경우 사후 몇 세기 후에 추증·추봉된 예가 많았다. 위경의 '회주군 추봉'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충렬왕 때는 장흥위씨로 속명이 위원개(魏元凱)인 원감국사가 있었다. 그는 1284년(충렬왕 10)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한림(翰林)이 된 후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 승려가 되어 조계사(曹溪寺)의 제6세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특히 원감국사는 후에 원나라 세조의 초청을 받았을 만큼 대덕자(大德者)로서 위명을 떨친 인물이어서, 장흥출신인 그의 국가에 대한 공훈에 대한 보답으로, 장흥임씨와 더불어 장흥사회에서 위화성씨이며 토호세력으로 유명한 장흥위씨의 시조 위경에 대해 '회주군'을 추봉하였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장흥위씨들이 언제 장흥지역에서 기세(起世), 계대를 이어왔을까. 시조 위경이 신라국에 입국하면서 바로 장흥지역에서 기세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행주은씨의 시조로 위경과 같은 8학사의 한 분으로 알려졌던 은홍열(殷洪悅)이 은퇴 후 행주에 정착한 것처럼, 위경도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장흥지역에 정착했을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위경이 아찬에 오르면서 '귀화 귀족'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어, 위경 이후의 위씨들은 얼마간 경주에서 뿌리를 내렸을 가능성이 크고, 몇 계대를 지나면서 성씨 일부가 장흥으로 내려와 토착세력으로서 기세했거나 또는 신라 말 극심했던 왕족간의 암투 등으로 어지러웠던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변방 중의 변방인 장흥지역으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장흥위씨 측에서는, 위씨들이 장흥지역에 거주하게 된 때를 고려 초엽으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1세조인 위창주가 대각(大覺)한 분으로 불교와 관련이 깊었을 것으로 여겨, 당대에 천관산 지역과 보림사를 중심으로 불교가 크게 융성했을 장흥으로 입지해와 위씨의 계대를 이어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장흥도호부 성씨 조에는 수령현의 성씨가 위(魏)·박(朴)·조(曺)·함(咸)으로 나와 고려시대 장흥에서 위씨는 토착력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어쨌든, 고려시대가 개막되면서 장흥위씨는 비로소 현달하게 된다. 고려 초 1세조인 위창주 이후, 5세조 위계정대까지 중앙관료에 진출한 인물들이 <고려사> 등에 여럿 나온다. <고려사>에 나오는 장흥위씨의 최초의 인물은 위덕유(魏德柔)로, 980년(성종) 병부낭중(정5품)으로 중앙관직에 진출, 송나라에 가는 사신단에 낀다. 고려개국 70여년이 지난 성종 때의 일이었다.

<장흥신문/제295호/2003.11.19>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