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씨 세계는 중조 1세조 창주 이후 2세조는 달(澾. 門下承宣 監察御使), 3세조는 원보(原補. 中郞將), 4세조는 기로(耆老. 平章事), 5세조가 위계정이다. 위계정 이후 6세조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소(魏紹), 7세조는 원개(元凱. 仁凱. 文凱. 信凱) 원감국사로 이어지며, 이후 8세 극겸(克謙) - 9세 경효(景孝) - 10세 온(溫) - 11세 인감(仁鑑) 등을 거쳐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발, 귀양을 간 판공사 위충(魏沖)이 원개 8세 종손이자 14세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같은 위씨 세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위씨들이 <동국통감><고려사> 사기에 더러 나온다. 위씨 측에서는 이분들에 대해 위씨의 방조(傍組)로 보고 족보의 누락이나 또는 실계로 인정하고 있다.

<고려사>등에 나오는 위씨 최초의 인물인 위덕유(魏德柔), 그는 980년 병부낭중(정5품)으로 중앙관직에 진출, 989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며 송제로부터 광록대부(光綠大夫)를 제수 받는다. 고려 초엽 성종 때의 일이다.

위덕유 다음의 인물은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魏從)으로, 1011년(현종 2년) '강조의 정변'으로 유배된다. 강조의 정변은 1009년(고려 목종 12),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일으킨 정변이었다.

곧 이어 1049년(문종)에는 병부상서인 위숭(魏崇)이 호부상서를 겸임(정 3품)하게 된다. 또 1081년(문종)에는 우보궐(右補闕) 위강(魏絳)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1135년(인종)에는 군후(軍候) 위통원(魏通元)이 서해에서 병선 50척을 거느리고 묘청의 토벌에 나선다. 또 1200년(신종)에는 위돈겸(魏敦謙)이 경주부유수(慶州副留守)로 제수되며, 1212년(강종)에는 위대여(魏大與)가 십운시(十韻詩)에 선정되며, 1250년에는 낭장(郎將) 위공취가 몽고에 파견된다.

또 1260년(원종)에는 위문경(魏文卿) 형제가 장원에 급제한 사실이 나오지만, 여기서 문경은 원감국사 원개의 동생 문개(文凱)의 오기인 듯 여겨진다. 문경이 아닌 문개는 이후 부역·병역 기피자를 잡아오는 일을 맡기도 하며(1269년), 1271년에는 평양으로 도망간 백성을 검거하는 일 등을 맡으며 국자박사(國子博士), 중랑장(中郞將)에 이른다. 또 1359년에는 고성현령 위양용(魏良用)이 적과 싸워 등용된다.

이본(二本)이 아닌 단일본인 위씨였으므로 이들이 비록 족보상에는 누락되었지만 장흥위씨였음에는 분명하다. 이처럼 고려 초·중기에서 말엽까지 장흥위씨는 성세를 누리며 크게 현달했던 것이다. 장흥임씨의 시조 임의(任懿 1041-1117)가 현종 때 처음 나타난 것과 비교하면 매우 흥미 있는 현상이라 할만하다.

위씨 세계에서 나타난 3세조 위원보(魏原補)는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러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또 4세조인 평장사 기로((耆老)는 1018년(현종 19년) 때 등과했다. 등과 후 상서문하시랑동평장사(尙書門下侍郞同平章事), 문하시중태보(門下侍中太保)에 오른 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종1품)에 이르렀다.

그리고 5세조 위계정(魏繼廷정)은 문종 때 문과에 급제, 좌보궐지제고(左補闕知制誥)를 지냈으며, 1091년(선종 8) 예부시랑 때 송나라를 다녀 왔다. 숙종 초 예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내고, 1105년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으며, 예종 즉위 후 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을 지내고, 1106년 수태보(守太保)에 이르렀던 명신 중의 명신으로 장흥위씨를 일약 명문거족으로 빛낸 일대 거인이었다.

6세조 위소(魏紹)는 몽고와 싸운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1224년(고종)에 허벅지 살을 떼어 모친의 병환을 치료하였을 만큼 효성이 지극했다(<고려사>). 그러나 1231년 (고종 18년), 그의 아들 원개의 나이 6살 때 몽고병의 용주 침입시 포로가 되고 만다(<동국통감>).

7세조는 원개(元凱). 호는 밀암(密庵), 초명은 법환(法桓), 속명이 원개(元凱)였고, 시호가 원감국사(圓鑑國師)였던 충지(沖止 1226∼1293)는 1244년(고종 31년)에 예부시에 장원하며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1252년에 승려가 되면서, 원오국사(圓悟國師)의 법통을 잇고 조계사(曹溪寺)의 제6세가 되었다.

그는 또 원나라 세조의 초청을 받고 대도(大都:현 北京)에 가서 빈주(賓主)로 대접받고 금란가사와 백불(白佛)을 하사받았으며 저서로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을 남겼는데, 1293년 충렬왕이 그에게 '원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원개(元凱) 동생인 문개 밑으로는 동생 신개(信凱)가 있었는데, 신개도 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원개·문개에 이어 과거에서 급제하여, 이들 3형제가 살던 장흥 땅에 장원봉(壯元峰), 거발봉(居末峰)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생겨난다.

고려가 망할 즈음에 위씨들은 쇠운에 접어든다. 문개의 8세 손으로 공민왕 때 합문판사(閤門判事)였던 14세조 위충(魏沖)이 이성계의 혁명을 번복하려는 모의(고려왕조 복고운동)에, 김종연(金宗衍) 판삼사(判三司) 지용기(池湧奇) 조유(趙裕) 등과 함께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곤장을 맞고 멀리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이성계가 등극하자, 위충은 마침내 자포자기하며 스스로를 돌보자 않고 집에 칩거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이 때문에 위씨는 그로부터 3대에 걸쳐 벼슬길이 막힌다. 즉 그동안 지금의 장흥읍 장원봉 밑(지금의 장흥향교와 법원사이)에서 성촌하며 살았던 위씨들은, 휘충(諱沖)의 실각 이후 인해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역경을 겪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충의 충(沖)의 자(子) 15세 위덕룡(魏悳龍.通善郞)이 장원봉 밑 구거지를 버리고 장흥읍 평화리에 정착하게 된다. 덕룡은 자을(自溫.伯)·자량(自良.仲)·자공(自恭.叔)·자검(自儉.季) 등 아들 넷을 둔다.


● 장흥위씨의 상계분파 시기


16세인 이들로부터 위씨의 상계분파가 시작된다. 즉 자온이 '능주파'다. 21세인 천우(天祐.청양현감)·천보(天保)가 그의 후예이다. 또 자량의 아들 종복(宗復.17세)은 유형(由亨)·유정(由貞) 두 아들을 뒀는데, 관산일대에서 살았던 유형으로부터 관산파, 행원 일대에서 살았던 유정으로부터 행원파가 이어진다(이때부터 세칭 관산파와 행원파로 갈라진다). 그리고 종복의 동생인 종로(宗魯.17세)로부터 여천파가 이어진다.

또 덕룡의 셋째인 자공은 손자로 서(瑞)·돈(頓) 손자 둘을 둔다. 자공의 장손으로 18세 서(瑞)는 장흥에 남아 용산 계산에 살며 사월파(沙月派)가 형성되고 자공이 차손 18세 돈(頓)을 데리고 세종조(1418∼1450)에 함경남도 함흥으로 가면서 관북파라는 지파가 이루어진다. 덕룡의 넷째인 자검은 자손을 두지 못했다. 따라서 장흥위씨의 상계분파는 16세 때부터 시작되고 여기서 수십 지파로 분화·분파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충의 증손이기도 했던 종복(宗復)이 한성참군을 지내면서 비로소 장흥위씨는 다시 벼슬길을 트게 된다.

관산파인 위유형의 증손 위덕원(魏德元.21세.1549∼1616)은 임진왜란 때 권율 휘하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으며, 위덕의(魏德毅.21세.1540∼1613)와 위덕화(魏德和.1551∼1598)는 한 형제로 피난길에 오른 선종를 호종하며 전란을 치러 공신이 되었고, 그들의 현손인 정훈(廷勳1578∼1662), 정철(廷喆.1583∼1657), 정오(廷嗚1589∼1640) 등은 선대의 뜻을 받들어 병자호란 때 참전, 크게 공을 세우며 충의 가문으로서 전통을 잇는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조선조에 위씨 가문을 크게 빛낸 인물은 최근 학계로부터 새롭게 평가를 받기 시작한 호남실학의 거목 존재 위백규(存在 魏伯珪.1727∼1798), 그도 바로 이 집안 출신이다.

관산파의 대표적 인물이 존재(存齋)라면, 속칭 '행원파'인 유정 집안에서는 입향조 유정의 손자인 대용(大用.21세.1530∼1610)과 대기(大器.21세.1559∼?)를 꼽을 수 있다. 명조 10년에 사마시 무과에 합격한 대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김천익(金千益)을 도와 호남모곡도유사로 군량미조달에 큰 공을 세웠고, 대기는 가리포 첨사로 있던 중 임란을 맞아 해남현감으로서 충무공 휘하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율포·옥포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그들로부터 홍면비장군(紅面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용장이었다. 위대기는 전쟁이 끝난 후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제수 받았다. 이 집안의 대경(大經.1555∼1597)·순정(舜廷)등도 임란 공신들이다.

이 두 집안 외에 위종복의 아버지 때(세종조) 갈려 나간 위자온(魏自溫)의 능주파, 멀리 관북으로 이주한 위자공(魏自恭)의 함흥파, 위종복의 동생 위종로(魏宗魯)의 여천파가 있다.

능주파 자온의 6세손 천우(天祐)도 담양부사 재임 중 임란을 만나 노량해전에 참전, 무공을 세웠다.

함흥파는 세종 때 갈려나가 장흥파들과 별로 교섭이 없었으나, 이시애난 때 공을 세운 19세 위세충(魏世忠), 임란 때 의주부사로 활약한 위한양(魏漢良), 그의 동생으로 의병장이 된 위륜양(魏倫良), 영조 때의 호조참의를 지낸 위창조(魏昌組.31세), 그의 아들로 강원감사를 지낸 위광조(魏光組) 등이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특히 함흥파는 조선조에 지역적인 이유에선지 위씨집안에서 인물을 가장 많이 낸 집안으로 알려졌는데 조선조에서 30명의 문과 급제자, 107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한국학 교수 에드워드 와그너가 '사회완충제도로서 과거-조선 북장 3도 주민의 경우'라는 논문에서, 조선조에 상당한 차별대우를 받던 북방민들 중에 유독 장흥위씨 함흥파가 관계 진출을 가장 많이 해 함경도에서 명문세가를 이루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제 때 만주와 러시아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위석규(魏錫圭(1883∼1913)는 관산파 위덕의의 9세손이다.

1930년 조사('祖先의 姓', 조선총독부, 1934년)에 의하면, 총 2,526가구가 있었으며, 그 중 1,013가구가 전남에, 779가구가 함경남도에, 210가구가 평안북도에 분포되어 있었다. 군별로는 전남장흥군이 588가구가 으듬이었다. 그리고 20세대 이상 거주 동족마을은 ▲여수군 동천면 산수리 70호 ▲완도군 청산면 국산리 22호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 38호 ▲장흥군 관산읍 용전리 25호 ▲장흥군 유치면 단산리32호 ▲장흥군 관산읍 옥산리 33호 ▲관산읍 옥동리 16호 ▲관산읍 방촌리 83호 ▲안양면 담암리 19호 등이었다.

1980년 초 국세조사에 의하면, 남한의 위씨 가구수는 3,950 가구(1만8천여명)로 나타나 순위 77위였다.

그리고 1985년 11월 1일 국세조사에 따르면, 장흥 5,420가구 22,726명, 관산 108가구 566명, 광산(光山) 18가구 54명, 함흥 14가구 65명, 수령 16가구 59명, 해남 17가구 54명, 전주 11가구 49명, 고흥 4가구 17명, 기타 미상이 121가구 631명으로 집계되었다.

<장흥신문/제296호/200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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