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7-03-27


장흥은 남도 중에서도 벽지이다. 하지만 진정 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송기숙, 안병욱, 박범신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모두 장흥 출신이다. 이제 장흥으로 간다. 가장 먼저 만날 사람은 이청준이다. 버스는 장흥읍에서 회진으로 가는 길을 달렸다. '선학동 나그네'의 사내가 지났던 길을 그대로 밟는 셈이다.

회진 시내버스 정류장. 아이들에게 차창을 통해 주변을 둘러보라고 했다. 정말 평범한 곳, 어느 시골에 가도 언제나 볼 수 있는 한적한 시골 버스 정류장,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감격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몇 번이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아이들은 이미 여기가 바로 '선학동 나그네'에서 소리꾼 누이의 행적을 쫓는 사내가 버스에서 내린 회진 종점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린 이미 '선학동 나그네'의 사내가 되어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문학기행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정말 평범한 대상이지만 의미를 부여하고 보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일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 문학기행의 의미다. 아이들은 이미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회진을 지나서 회진초등학교를 지났다. 왼쪽에는 넓은 회진 갯벌이 누워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진목으로 넘어가는 산모퉁이에 '선학동 나그네'에서 돌고개라 불리는 가파른 고갯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버스는 이청준 생가가 있는 진목으로 먼저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2차로 지방도를 걸어갔다. 산모퉁이를 도는가 싶더니 눈앞에는 선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이 있어야 할 곳에 물이 없었다. 바닷물은 언제부턴가 돌고개 기슭에서부터 출입이 끊겨 있었다. 돌고개 기슭과 관음봉의 오른쪽 산자락 끝을 건너 이은 제방이 포구의 물길을 끊어 버리고 있었다. 포구는 바닷물 대신 추수가 끝난 빈 들판으로 변해 있었다. 들판 건너편으로 오기종기 집들이 모여 앉은 선학동의 모습이 아득히 떠올랐다. 비상학(飛翔鶴)의 모습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포구에 물이 없으니 선학(仙鶴)은 처음부터 날아오를 수가 없었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면 관음봉은 그래 한 마리 학으로 물 위를 떠돌았다. 선학동은 그 날아오르는 학의 품 안에 안겨진 마을인 셈이었다.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 부분)


물론 선학동이란 지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청준이 선학동이란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가난으로 점철된 개인적인 불행의 땅인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이청준은 고향을 떠나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선학동 나그네'에서 묘사하고 있는 풍경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아이들은 말했다. 논으로 변해버린 선학동 포구가 여전히 바다 같다고. 그래서 거기에서 학이 날아오를 것 같다고. 미처 자라지 못한 벼 포기 사이로 여전히 관음봉 자락이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어디선가 학이 무리지어 날고 있다는 환상 속에 머리를 몇 번이나 흔들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 '선학동 나그네'

'선학동 나그네'는 '서편제', '소리의 빛'과 함께 남도의 소리를 제재로 삼고 있는 이청준의 작품이다. 오직 소리 하나에 평생을 바치며 떠돌이로 살아가는 아버지, 소리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된 딸, 또 그들을 버리고 떠났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누이를 찾아 헤매는 오라비 등 모두 가슴에 서린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품은 한의 예술적 승화를 표현하기 위해 ‘비상학’이라는 상징적 형상을 동원하고 있다. 특히 이 땅 위에서의 인간의 한이 자연을 통해 녹아들어 자연과 인간의 소통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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